본문 바로가기

책읽기-영화보기

어울림의 공부모임이 가능한 조건, 그리고 ‘현명한 복종 - 현명한 지배’라는 오래된 미래의 공부형태

어울림의 공부모임이 가능한 조건, 그리고 현명한 복종 - 현명한 지배라는 오래된 미래의 공부형태

5-30 공부모임이 가능한 조건.hwp
0.03MB

 

여는 말 : 이 글은 연구소의 이름으로 진행한 공부모임의 중간 평가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부모임을 몇 달 동안 운형해 보니, 소수 몇명으로 끌고 가는 힘의 한계를 절감합니다. 다양한배경과 문제의식과 그것들에 대한 고민과 땀이 베인 결과들이 서로 어우러진 힘이 아니면, 지속적으로 공부모임을 끌고 가기 쉽지 않습니다. 앞서가는일, 따라가는일, 정서적연대를챙기는일 등등과 같은 어울림이 없이는 어떤 일도 지속성을 담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글의 의도는 연구소의 공부모임이건, 연구소의 운영에 관한 일이건, 그런 어울림의 손길을 보태달라는 겁니다.

연구소의 회원 구성이 최소한 반백년 이상을 살아온 사람들이 대다수이고, 연구소가 관료적인 서열이나 기능으로 구성된 것이 아닌 상황에서, 연구소의 모든 작동은 순수하게 자발성에 의한 어울림으로 굴러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위계와 기능적 역할에 따른 관료적 형식이 아닌, 무형식의 형식으로서 어울림에 대한 시험적 모색입니다.

 

1. 지향점과 한계설정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조직에서 복종과 지배를 말한다는 것이 영락없는 스캔들로 보입니다. 자유를 제한하는 제도와 관행들이 아직도 세상에는 차고 넘치며, 평등 보다는 불평등을 생산하는 교육행위(schooling habitus), 아직도 세상은 강고하게 그리고 치밀하게 학교현장의 일상 속에 강제합니다. 연말이면 어떤 학교가 어떻게 학생들의 자유로운 성장의 기회를 박탈해서, 불평등하게 소수의 몇몇에게 평생에 걸쳐 수확하게 될 기회인, 상징적 재화들로 전환해서 배분했는지 계량하느라 바쁩니다. 그런 비교육적 성과를 자기 성과로 치환해서, 관료적 경쟁의 무기로 바꾸는 셈법도 무궁무진합니다.

교육체제의 부자유와 불평등이 극복해야할 질긴 싸움의 주제인 현실에서 복종과 지배를 말한다는 것은, 보편적 언어로서는 부당한 진술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은 학교나 교육현실이 아닌 연구소 내부용입니다. 같이 공부하는 공동체를 꾸려 보자는데 뜻을 같이하는, 내부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제한적 서술입니다. 이렇게 글의 내용이 지향하는 타겟을 분명하게 설정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를 최소화하자는 의도입니다.

 

2. 러더쉽 형태

리더쉽의 전통적인 분류표는 베버의 작품입니다. 베버는 리더쉽을 그 역사적 기원에 따라서 전통적-카리스마적-합법적 리더쉽으로 나누었습니다. 전통적 리더쉽은 혈통에 따라서 귀속적으로 주어진 권위에 의하여 만들어집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왕의 리더쉽이 전형적인 전통적 리더쉽 입니다. 카리스마적 리더쉽은 카알라일이 몰락하는 중세적 귀족에 대한 향수를 소환하는 형식 속에 있습니다. 아직 새로운 시대인 근대는 오지 않았고, 귀족의 눈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산업혁명의 매연이 가득한 혼란함 속에서, 카알라일은 과거의 귀족적 고귀함이 구원으로 보였을 겁니다. 합법적 리더쉽은 근대적 관료제의 탄생으로 가능해진 리더쉽 형태입니다. 주어진 관료적 역할수행의 기능에 대한 복종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국가가 작동하기 때문에, 국가의 작동 기능에 대한 복종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어찌 되었든 세가지 리더쉽의 형태는 모두 지배자의 지시적 역할 노릇에 대한 피지배자의 순종적인 수용입니다. 왕의 노릇(전통적 리더쉽), 영웅적 귀족의 노릇(카리스마적 리더쉽), 국가 관료의 기능적 노릇(합법적 리더쉽)을 인정하고 수용한다는 동일성의 기반이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현복지는 이런 지배-순종 노릇의 일방적 방향성을 부정합니다.

 

3. 현복지(현명한 복종과 현명한 지배)

현복지는 노릇과 기능이라는 사회적으로 범주화된 분류표를 부정합니다. 사실상 어떤 개인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평생 살아가는 삶은 사회적으로 범주화된 분류표에 적힌 기능이나 노릇을 학습하는 것입니다. 이게 그 어렵고도 쉬운 말인 사회화에 대한 가장 단순한 개념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분류표는 부모, 자식, 친구, 애인, 상사, 수하, 동료, 선배 등등으로 되어있습니다. 사회의 작동 원리는 이런 범주표에 적힌 기능 또는 노릇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기능하기 위해서, 상사로서 기능하기 위해서, 친구로서 기능하기 위해서, 선배로서 기능하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에 대한 표준적인 행위 매뉴얼이 미리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런 매뉴얼에서 벗어나면 사회적 징벌이 따릅니다. 그런 징벌은 물질-법률-명망-신뢰 등의 형태로 손실을 강제합니다. 모두가 기를 쓰고 사회적으로 부여된 기능이나 노릇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이유입니다.

기능이나 노릇이라는 계선을 따라서 지배권력이 작동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이런 기능이나 노릇과 잘 접붙어 있습니다. 아버지 노릇을 위해서 돈을 벌고, 자식노릇을 위해서 취업에 목을 매고, 친구 노릇을 위해서 술을 사고, 애인 노릇을 위해서 반지를 구매합니다. 노릇과 기능이라는 역할에 자본주의가 잘 접합되어있습니다.

현복지(현명한 복종과 지배)는 이런 노릇과 기능에 따른 지배관계를 부정하는 버릇에 관한 주장입니다. 노릇과 기능이 주어진 사회체제에 미리 주어져 있는 적응 매뉴얼이라면, 버릇은 그런 노릇과 기능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어긋내기 입니다. 무릇 새로운 공부란 주어져 있는 주류체제에 대하여 어긋내는 비판이란 버릇입니다. 버릇으로 몸에 체질화 되지 못한 비판은 항상 체제의 재포섭 기능에 되먹혀집니다.

현명한 복종, 현명한 지배는 이런 버릇들에 대한 존중입니다. 한사회의 모든 공적부분이 모두 그렀듯이, 현대 한국의 학교체제를 가장 짧게 요약하자면, 관료제입니다. 따라서 버릇이란 관료시스템에 대한 어긋내기 버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계적 서열로 배치된 관료적 기능이나 역할 노릇들은 특정한 어떤 사람들을 따라서 피라미드 형태의 계선으로 구성됩니다. 관료시스템이 그에게 부여한 기능이나 역할 노릇들이 사람의 위계적 서열이나 배치에 따라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런 기능이나 역할 노릇에 비해서 버릇은 특정한 방향성이 있는 서열적 형상이 아닙니다. 어울림의 참가자가 가지는 그때 그때의 그리고 상황 상황의 힘에 따라 자연적으로 그리고 자율적으로 구성되는 변화이기 때문에 현명한 복종이면서 현명한 지배여야 합니다.

이런 정형화가 불가능한 어울림을 김영민은 나비의 군무 형상 또는 돌고래들의 집단유영 형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합니다.

 

 

4. 어울림의 공부 유형들

아래 글은 김영민의 동무(同無)와 연인이라는 책의 일부를 발췌한 겁니다. 김영민은 동무(同無)와 연인동무(同無)이라는 책을 준비하면서 우연하게 얻은 부산물이라고 말합니다. 김영민의 동무론 3부작인 동무와 연인’ ‘동무론’ ‘비평의 숲과 동무 공동체를 위상학적으로 정리하자면, ‘동무와 연인은 서론이고, ‘동무론은 동무에 대한 학문적 탐색이고,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는 동무의 어울림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실천적 방법론으로 결론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동무와 연인의 일부를 발췌하는 것은 현명한 복종과 지배라는 어울림의 한 형태를 어렴풋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4-1. 볼테르와 샤틀레의 어울림

유럽 계몽의 군주라고 불리는 볼테르의 업적은 많은 부분 샤틀레에 빚지고 있습니다. 남자들만의 영역이었던 과학과 수학의 세계에서 샤틀레는 여자이면서 뛰어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당시에 최고의 최신의 과학이었던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이미 통달하고 있던 샤틀레의 존재는 볼테르에게 신선한 지적 자극이었습니다. 샤틀레를 통해서 볼테르는 당대의 최신의 최고의 과학적 성과를 흡수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볼테르와 샤틀레가 공동으로 꾸린 장서가 웬만한 공적 도서관을 능가했다고 하니, 둘이 같이 읽고 쓴 어마무시한 지적 성취가 있었겠지요. 이런 지적 성취의 대부분이 프랑스를 중세의 미망으로부터 깨워 일으킨 볼테르의 계몽의 빛으로 독점적으로 전유되었습니다. 이런 불평등한 관계는 결국 둘 사이의 관계를 파경으로 이끈 사회적 조건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개인의 삶의 양상은 당대의 체계로 부터 거의 대부분 유래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발본적 접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당대의 체계로부터 기인하는 남녀의 불평등한 착취적 관계는 무수합니다. 아인슈타인을 과학자로서 첫발을 내 딛게 한건 밀레바마리치의 수학적 재능이었다고 하고, 맑스 저작의 절반은 예니베스트팔렌에게서 왔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들 어울림의 공통성은 당대의 남녀 불평등의 사회적 힘들이 이들 관계에 그대로 관철되었다는 겁니다. 남자들의 일방적인 결과물의 독점과, 여자들의 일방적인 희생이라는 틀에서 한치의 빈틈이 없습니다.

 

 

 

4-2. 프로이드와 융의 어울림

 

내 아들 알렉산더여! 내가 정복한 것 보다 더 많은 영토를 네가 정복할 수 있도록 해 주마!”(프르이트가 융에게 보낸 편지. 1920, 03, 06.)

 

프러이트와 융은 처음 만나서 13시간을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 같은 친밀성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깊은 호의를 나누었습니다. 그랬던 두 사람은 그 친밀한 관계를 지속하지 못하고, 단지 몇 년 만에 원수가 되어 결별합니다. 이런 결별을 해석하는 방식은 여럿입니다. 그중 하나는 내리 사랑과 치사랑입니다. 내리 사랑은 생물학적으로도 자연스럽습니다. 자신의 유전정보를 지속적으로 전달하고 보존하는 방식으로 제격입니다. 반대로 치사랑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붙이는 사랑이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도 부자연스럽습니다. 물리적 중력을 따르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움이 내리 사랑이고, 중력을 거스르는 억지스러움이 치사랑입니다.

프로이트는 자신이 만든 세계정신분석학회의 초대 회장으로 융을 추대합니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나의 아들이자 계승자다 라고. 뜨겁게! 프로이트의 융에 대한 내리 사랑은 거짓말처럼 원시적이고 생물학적입니다. 융을 통해서 자신을 복제하겠다는 욕망이 날것 그대로 드러납니다. 융을 자신과 다른 독립적 인간이라는 성숙한 인식이 없는 독재자의 권위를 노골적이고 외설적으로 노출합니다. 어린 아이가 아닌 이상 이런 관계를 버텨낼 성숙한 개인은 없습니다.

신을 죽이고 인간을 과학적 인식의 대상으로 설정하려고 노력했던 프로이트에게서 융은 어떤 천재성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융은 프로이트가 신을 죽이고, 죽인 그 자리에 또 다른 신으로 설정한 리비도가 있음을 간파하였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만들어 주었던 매체가 결국 결별의 매체로 전환된 것입니다. 사랑의 원인이 증오의 원인으로 바뀌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 모순투성이인 인간의 삶입니다. 위대하다는 대학자들의 만남과 결별도 그런 형식에서 그리 멀리 있지 못 합니다.

결론적으로 동무(同無)들의 어울림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수직적 위계적 관계는 항상 조심하고 경계해야할 관계입니다. 나눌 수 없는 독립적 개체(in-dividual)인 개인이라는 관계가 어울림의 최소조건으로 항상 유념되어야 합니다. 공부모임에서 이런 어울림의 최소조건을 상실하면, 금방 지배-종속 관계가 선명하게 자리를 잡습니다. 사회체계가 그렇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사회적 힘이 공부모임을 금방 오염시킨다고 보아야 합니다. 선후배도 아니고, 상사-수하도 아니고, 관료적 기능이나 노릇도 아닌, 주류 사회체계의 범주들로 환원할 수 없는, 그럼에도 같이 어울리는 관계가 새롭게 만들어야 할 관계형식입니다.

 

 

4-3. 박지원과 백탑파의 어울림

백탑파(북학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대한 거친 스케치 : 박지원(소설가) + 김홍도(화가) + 이덕무(고증학자) + 박제가(과학자) + 홍대용(음악가) + 유득공(역사학자) + 백동수(무사) + ,,,,,,

(참조 : http://www.dapsa.kr/blog/?p=23884)

 

나이도다르고, 재능도다르고, 관심도다르고, 지위도다르고, 성정도다르고, 같은 것이라곤 거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어울릴까? 김영민은 동무와 연인에서 그런 관계형식의 하나의 예시로 이덕무와 박제가의 관계를 들고 있습니다. 둘은 10여년의 나이 차이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어울렸습니다. 청아한 학과 저돌적인 물소 같았던 기질적으로 완전히 상반된 성정도 큰 방해가 되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이 어울릴 수 있었던 건, 물론 서로 충돌하는 걸 피할 수는 없었겠지만, 틈이라고 말합니다. 김영민은 친구로서 무릎을 맞대고 같이 앉아 있더라도 둘 사이에 틈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관계의 틈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틈에 서늘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이면 의미가 약간 출렁입니다. 그럼에도 부족합니다. 이걸 김영민은 부정의 형식으로 말합니다. 현재의 주류적 체계 속에는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부정의 형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여러 부정의 형식이 있겠지만 특별히 김영민이 주목하는 건 친구가 아닌 것입니다. 김영민은 친구가 자본주의적 소비문화에 너무 많이 오염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술과 관련된 소비문화에 너무 많이 침윤되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친구관계는 이 되어보지 못해서 한번도 가 되지 못한 채, 공동의 침체를 도덕이라고 부르고, 공동의 나태를 평화라고 부르며, 공동의 타락을 질서라고 부르는 관계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런 친구관계가 아닌 관계는 동무(同無)관계 입니다. 주류적 체계와의 불화를 일상화해서 인정투쟁(성공)-냉소(지적허영)-가족주의를 넘어서는 위험한 삶을 체질화한, 그래서 내 삶의 양식을 그 근간에서 뒤흔드는 관계입니다.

박지원과 백탑파의 어울림이 그런 어울림에 가장 가까울 것 같습니다. ‘소설가 + 화가 + 고증학자 + 과학자 + 음악가 + 역사학자 + 무사 + ,,,,,,’라는 각기 다른 버릇들이 어울리면서 중세의 조선을 버텨내는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서로의 어울림에 의해서 각자는 중세의 조선을 멀리 벗어나서 소설에서 과학에서 미학에서 ---, 각자의 영역에서 근대적인 세계를 열었습니다. 박지원과 그의 동무들에게서 분명한 것은 그들 대부분이 과거제도 속에 안주하기를 작위적으로 거부한 중세적 조선을 벗어난 최초의 근대적 징후였다는 점입니다.

각자의 버릇이 중세적 조선이라는 주류체계와 어긋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걸 참지 못했던 군주 정조는 문체반정으로 그걸 교정하려 들었습니다. 정조에게 이들은 조선이라는 체계에 대한 근본적이고 심각한 위협이자 도전으로 보였습니다. 정조의 문체반정을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럼에도 서로에 의지하면서 슬그머니 능구렁이처럼 넘어갔습니다. 중세의 조선에 어긋내면서 각자의 영역에서 새로운 미래를 열었습니다. 그래서 김영민은 이들을 오래된 미래의 어울림의 원형으로 해석합니다.

 

닫는 말 : 결론은 연구소의 공부모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참여해 달라는 요구입니다. ‘함께 놀자!’가 요구사항 입니다. 같이 일하면서 누군가는청소하고 누군가는복사하고 누군가는김밥을준비하고 누군가는정서를돌보는 등등의 손을 하나 넣어 주는 일이 그 모임을 죽이고 살립니다. 청소년노동인권 청소년상담 진로지도 학생생활지도 학생자치활동 등등의 셀 수 없는 많은 분야의 땀들이 부정기적으로 라도 모여야 연구소가 작동합니다.

 

 

2020. 05. 30

 

전 남 교 육 연 구 소 (책임작성자 :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