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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지켜야 하나? 아니면 파약(破約)을 해야 하나? 약속과 파약을 넘어서는 새로운 길은 있는가? - 실천 (p 58-71)

약속을 지켜야 하나? 아니면 파약(破約)을 해야 하나? 약속과 파약을 넘어서는 새로운 길은 있는가? - 실천 (p 58-71)

4-6일 세미나자료 약속과 파약의 존재론 그리고 실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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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의 문제의식 중에서 가장 독특한 것의 하나가 약속이라는 개념입니다. 세속이라는 것이, 현실세계라는 것이, 인간의 이기심으로부터 출발하는 오인-변명-변덕-환상의 합리화체계라는 겁니다. 애초부터 논박 당하지 않는 진실이란 없다는 가정과 같습니다. 이런 세계에서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악마적 충실성에 근거해서 지속적인 실천을 축척하여 현실을 뚫어낸다는 겁니다.

약속이 진리를 보증하는 형식이라는 김영민의 이런 개념은, 진리가 해체된 포스트모더니즘적 사회에 대한 일종의 진리 재구축 시도라고 읽을 수 있고, 지식(-이론)이라는 것의 실질적 작동에 대한 정교한 추론이라고 해석해 볼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지식(-이론)이 그 기능적 효용을 확보하려면, 알면서 모른 채하기의 숙성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설명은 더욱 그러합니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이 의식의 표피에 머무르는 수준은 지식으로서 그 효용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단계입니다. 그것이 무의식의 수준으로 내려와서 몸과 결합하고 체질의 변화까지 수반할 때, 그때야 비로소 지식(-이론)이 효용을 가진다는 겁니다. 의식의 표면에 머무르는 지식은 우리의 전통적 개념인 지행합일의 관점에서도 아직 지식이 아닌 지식입니다. 지식(-이론)이 몸의 체질로 차분하게 정착되기 이전의 상태를 김영민은 지랄이라는 개념으로 제시합니다.

 

지식(-이론)이 몸의 수준으로 내려와서 그 사람의 체질 변화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김영민은 알면서 모른체하기라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알면서 모른 체하기의 방법론을 사회운동의 차원으로도 번역해 볼 수 있습니다. 지구온난화가 전지구적인 가장 시급하고 핵심적인 의제라는 지식 선언은 현실이라는 지평에서는 아직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이게 현실에서 실제로 작동하고 제도를 바꾸고 사람들의 행위형식을 바꾸는 지경까지 도달하려면, 수많은 시간과 실천활동과 노동이 투입되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알면서 모른 체 하기의 숙성과정이라고 비유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알면서 모른 체 하기가 지식(-이론)을 현실의 오인-변명-변덕-환상이라는 불모에서 구원할 수 있는 형식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해석하니 김영민의 약속이라는 개념은 일종의 불교적인 또는 동양의 전통적인 지식인들의 엄정한 윤리 실천의 자세를 떠 올립니다. 묵묵한 수행(修行-遂行)자로서 지식인의 이미지와 겹칩니다.

 

1. 이런 김영민의 약속이라는 개념을 좌파적 운동의 현장과 관련해서 논의하자면, 좌파의 고질인 지속적인 관계형식의 부재라는 문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거개가 우파인 지배체계는 대체적으로 관료적 형식에 견결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배체계에 형식으로 묶인 우파들은 아무런 이론-지식-앎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강고하게 묶인 관료제적 형식 때문에 지배체계를 보존하는 무언가를 생산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항하는 좌파들은 번득이는 이론-지식-에도 불구하고, 그걸 알면서 모른 체 하기의 견결하고 지속적인 실천을 위한 형식이 부재하기 때문에 결국 불모에 이릅니다.

체계는 형식이라는 무기 하나로 버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알면서 모른 체 하기를 좌파적 형식으로 적극적으로 전유하는 방식이 무엇일지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결론을 맺으니, 좌파의 고질은 끊임없는 새로운 이론의 생산이라는 지적이 민망하게 따라옵니다. 그래서 약속에 대한 개념을 더 밀어붙이면, ‘이론-지식-이 주체의 사적인 이기심과 사통하면서 일관성을 상실하는 것이 좌파의 실천성 부재의 원인입니다. 이걸 방지할 최소한의 형식이 연극적 실천으로 드러나는 약속입니다.

주체의 분열을 방지하고 일관성을 확보할 형식이 약속이라는 겁니다. 약속된 데로 연극적으로 실천하는 결과로서 새로운 견고한 주체가 탄생한다는 생각은 서구의 데카르트적인 생각하는주체와 대립각을 이루는 주체입니다. 내성적으로 만들어지는 주체(생각하는주체)가 아니라, 외부적 행위의 결과로서 만들어지는 주체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결과로서 주체의 탄생을 말하는 김영민은 서양의주체(생각하는주체)를 거꾸로 세웠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김영민의 실천과 관련된 약속 이론은 내성적인 성찰(생각하는)에서 주체를 구성하는 데카르트적인 근대주체(생각하는주체)의 탄생과는 다른 주체를 상정합니다. 그런 점에서 김영민은 서구의 철학사가 약속이라는 개념을 미실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착오라고 말합니다.

 

약속이라는 개념을 김영민 식의 정치한 사유를 삭제하고, 순전히 지배체계와의 관계 속에서만 실천하면 매우 현실 보수적인 이론이 됩니다. 대개 약속이라는 것이 법-도덕-규율-상식이라는 제도에 강고하게 사회적으로 규약화-조문화 되어 있습니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사회적 규약을 지킨다는 것이고, 이것은 현실의 지배체계를 승인하고 그것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보존하고 강화하는데 주어지는 역할을 수행하겠다는 서약과 다름이 없습니다.

 

2. 오히려 파약(破約)의 존재론이 현실을 바꾸어 나가고 진보적인 삶을 가꾸어 나가는 방식입니다. 현실의 지배체계가 요구하는 상식화된 조약이고 규약인 약속(전통적이고 주류적인 관습)을 저버리는 파약의 존재는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여는 사건입니다. 그것은 기득권에 도전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희롱하고 성가시게하고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시인으로 표상되는 예술가들이 사회적 총체성 파악이나 미래적 후각이 뛰어나고 약속을 깨뜨리는 파약을 체질화하여 그걸 주체화로 삼는 방식은, 파약이 가진 진보적인 생산성을 잘 보여줍니다.

김영민은 파약의 형상을 나비의 비행궤적으로 제시합니다. 총알이나 포탄처럼 예측 가능한 궤적이 약속의 운동방식입니다. 지배체계에 연계된 약속의 운동방식은 근대적 기획의 시작점인 선형적 기하학이고 기계적인 운동이기 때문에, 또 다른 근대적 기계인 관료제적 과학으로 그 궤적을 예측하여 포획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나비의 운동궤적은 불규칙적이고 비선형적입니다. 기하학적 예측을 허용하지 않으므로, 포획도 불가능합니다. 영리한 약자들의 궤적이 나비의 불규칙한 파약적 운신입니다.

 

강자가 지식을 선포하고 현시하는, 그것의 실행을 강제하는 망치를 들고 있다면, 약자인 나비는 그런 강자를 끊임없이 희롱하는 존재입니다. 망치를 들고 나비를 잡을 수는 없습니다. 나비는 물러나고 비켜가면서, 망치를 무력화하고, 빈허공을 남겨놓습니다. 이런 아무런 구체적 토대가 없는 빈허공이 약자의 진보적 생산성이면서, 동시에 비어있기 때문에 허무입니다. 이런 불모적 허무를 자승자박적 실천으로 채우는 것이 생산적 약속의 가능성입니다. 물론, 그런 약속의 실천은 강자의 지배적 규범이나 규율의 저편을 읽어낼 수 있는 가치판단을 전제합니다.

 

파약의 생산성에 대한 논의는 다시 김영민의 약속에 대한 논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파약의 존재론이 진보적 생산성으로 결절되는 것은, 지배적 진리가 전제하는 태도나 가치를 문제시하면서, 파약을 다른 약속으로 대체하는 실천적 가능성을 탐문하는 다른 형식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나비의 파약만으로는 너무 부슬부슬해서 현실을 버티어 낼 수 없고, 비평을 도구로 하는 동무(同無)관계의 진득한 지속성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파약적 관계라는 다른 약속의 형식적 실천이, 파약과 약속의 연결고리입니다. 이렇게 결론을 맺으니 약속-파약-약속-파약이라는 무한반복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성급하게 미봉하자면, 파약의 진보성을 탐문하면서, 그것의 실천적 현실토대를 잘 살피라는, 아무런 새로움이 없는 너무 평이하고 뻔한 말입니다.

 

3. 학교현장에서 파약의 존재인 그래서 학교라는 체계를 끊임없이 성가시게 하는 학생들의 존재는 학교라는 체계의 역할 수행을 지속적으로 바꾸어온 주요한 동력입니다. 파약을 새로운 사건으로 만들어서 그걸 체계의 혁신에 관한 동력으로 삼는 건 또 다른 차원의 능력입니다. 그런 점에서 학교가 파약의 존재들을 다루는 방식을 살피는 것은, 학교라는 제도의 한계와 그 새로운 가능성을 해명하는 시선이 될 수 있습니다.

 

참조) : 파약의 존재론의 한 예(나비의 은유)로 김영민은 군주인 정조의 망치질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모색했던 연암 박지원에게서 찾는다. 그런 시각은 정조의 문체반정이 박지원을 표적으로 기획되었다고 본다. 정조에게는 박지원이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새로운 시대정신이 담겨있는 이질적 문체들인 소품체의 범람이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정조는 박지원의 문체(소품체)가 조선이라는 성리학체제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문제라고 인식하였을 것이다. 정조와 박지원의 관계는 고미숙의 열하일기나 김영민의 동무와 연인이라는 책에 풍부하게 기술 되어 있다.

 

2020. 04. 06

 

전 남 교 육 연 구 소 (책임작성자 :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