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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 소개 및 개념정리

3-16 세미나자료 책(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 소개 및 개념정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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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 소개 및 개념정리. 3/16(월) 세미나자료

 

1. 앞선 말

지난주에 세미나 제안을 해 놓고, ‘그럼 네가 해’의 죄를 선고 받아, 그 죄로 일단은 세미나 자료 준비에 대해서 독박을 썼습니다. 당분간은 아마 그렇게 진행해야할 것 같습니다.이런 식의 제안이 자리를 잡으면서, 다양한 제안들이 성립하면서, 공부모임이 풍성해지기를 기대합니다. 기대에 앞서 밝혀야할 것은 막상 공부자료를 준비할려고 덤벼보니,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내용에 대한 숙지나 이해가 부족한 것이 명확하지만, 그래도 무식한 놈이 용감하다고, 그리고 일단은 말의 책임을 지는 것이 죽을 쑤든 밥을 짓든, 무언가 결과를 낳는다고 생각하고, 미숙한 대로 한발짝 내 딛겠습니다.

 

2. 책소개(비평의 숲과 동무(同無)공동체)

세미나 자료로 쓰게될 ‘비평의 숲과 동무(同無)공동체’는 김영민의 ‘동무론’ 3부작의 마지막 결산편입니다. 1권은 ‘동무와 연인’이라는 책이고, 2권은 ‘동무론’이라는 책입니다. 1권은 김영민의 말에 따르면, ‘동무론’의 부산물이라고 합니다. ‘동무론’을 쓰면서 얻게 된 소소한 결과들을 묶어 놓았다는 겁니다. 그런 결과인지 비교적 쉽게 읽히고 잡다한 교양으로서 지식들도 많습니다. 2권 ‘동무론’은 현대사회에 대한 다양한 측면에서의 분석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은 점은, 진보적인 운동의 성과가 일정하게 현실에 착종된 이후의 사회에 대한 설명들입니다. 그 중 가장 눈에 뛰는 것은 정보화 사회를 나르시즘 사회로 설명하는 것이고, 현대의 전방위적인 생활세계를 규제하는 절대적 지배체제인 자본주의와의 불화를, 어긋내기라는 형식으로 생활양식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결산에 해당하는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는 그런 생활양식화를 위한 연대의 방식에 대한 시론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연대의 방식이 동무공동체라는 것 인데,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 난해한 개념들의 난장판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해력이 모자라는 결과일 겁니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이해의 의지나 경험이 발생하지 않는 부루주아적 존재조건의 구속에서 발생하는 영향이겠지요.

 

3. 개념정리

김영민의 글들을 단번에 읽어낼 수는 없습니다. 문제설정이 워낙 근본적이고 메타적이고 엘리트적이기도 하고, 비판의 칼날이 끼어들 여지가 없도록 자신의 존재구속성을 완벽하게 단속하고 꾸려서 삶을 살고, 그걸 글로 표현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라는 범속한 삶의 기반을 가진 그리고 그런 체계에서 일정한 성공의 기반을 가진 우리(교사들 또는 교사였던 사람들)의 이해를 쉽게 허용하지 않습니다.

다른 면에서는 그가 세속적로 사용하지 않았던 개념들을 워낙 많이 창조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그런 개념들에 익숙해지는 훈련 노동이 따로 필요합니다. 따라서 이런저런 우회로를 통과하는 노력이 불가피합니다. 그런 우회로의 하나로 일차적으로 그가 사용하는 개념들에 대한 풀이를 시도하겠습니다.

 

 

3-1. 동무(同無)

김영민은 뜻이 같은 동지(同志)라는 말 대신으로 같은 게 아무것도 없는 서로 다른 남이라는 동무(同無)라는 단어의 사용을 제안합니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친구를 지칭하는데 사용한 단어였던 ‘동무’라는 단어를 다르게 살려냈다는 느낌이 듭니다.

동지라는 단어는 독재나 파시즘 같은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사회체제에 대한 저항을 위한 균일한 문제의식을 전제합니다. 동무라는 개념은 그런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걸 가리킵니다. 사회적 문제의식이 다양해진 현실을 대응하는 방식이 다양할 수밖에 없고, 축적된 삶의 배경도 제각각이고, 이데올리기적 물질적 존재구속성이 개별화된 현실에서, 각각의 개인들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반영하는 단어가 동무(同無)라는 개념입니다.

이렇게 풀어보면 동무라는 개념은 동일성이 없는 3인칭 복수의 사람들, 서로 다른 그들, 입니다. 이런 서로 다른, 같은 것이 전혀 없는 동무들은, 당연히 서로 다른 궤도와 패턴의 삶을 사는데, 그걸 김영민은 동선과 리듬이 불규칙적으로 펄럭이는 나비의 움직임으로, 동무들의 관계는 나비들의 군무와 같은 이미지로 형상화합니다.

 

3-2. 무능의 급진성

자본주의 체계와 어긋내기를 삶의 양식으로 삼는 사람이, 주어진 기본환경으로서 자본주의 체계에 기능적으로 순접되어 있다면 논리적 모순이 발생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과 같은 무능이, 체계와의 불화를 선택한 사람의 불가피한 무능이라는 설명입니다.

개인적으로 김영민의 이런 설명을 대하면서 속이 뜨끔해지는 걸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살아오면서 개인적으로는 무능하지만, 다른 통로로 자본주의 체계에 기능적으로 완벽하게 순접되어 있는 삶의 조건을 살피는 시선에 대하여 변명할 재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개인 수준에서는 자본주의와 불화하지만, 가족제도라는 또 다른 통로로 자본주의에 완벽하게 접 붙어 있는 존재조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고백은 뒤로 미루고 다시 김영민의 문제설정으로 되돌아오면, 체계와의 불화로 인한 무능이 동무들의 존재방식이라는 설명입니다. 이런 설명을 대하면서, 현실교육체계라는 입시위주의 교육에 저항하는 그리고 그것에 무능한 선생님들에 대한 정당화를 위한 논리로 수용하는 것 까지는 생산적인 측면이 있지만, 아이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인간적으로 미성숙한 선생님들에게 까지 이런 논리를 적용하는 건 개념의 오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가족제도-성별분업-사적이기심-보상욕망 등에 포획된 비교육적 장면들이 쫘르륵 스쳐갔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능의 급진성에 대한 개념을 현실에 적용할 때는 또 다른 수준의 정치한, 무능에 대한 개념정리가 필요하겠다는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거칠게라도 무능의 급진성을 구체화하면, 무용지대용(無用之大用)이고, 그걸 김영민은 낮은 자리에서 더 높은 자리를 훔친다고 말합니다.

김영민은 이걸 ‘그가 살았기에 그 땅이 아름다웠다’는 말로 표현하는데, 살다보면 우연하게 만나게 되는, 그가 속한 주변을 자신의 존재만으로 정화하는 영향력을 말합니다. 단지 그가 거기에 있다는 것으로, 아무런 사회적 지위를 갖지 않음에도, 심지어 그 사회의 주류적 가치와 어긋남으로서 무능한 존재로 표현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속한 세계를 다르게 만들어 내는, 지면서 이기는 삶의 방식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3-3. 비평

비평을 설명하기 위해서 김영민은 상담이나 (심리)분석과의 비교를 합니다. 상담은 상담자의 일방적인 주도성이 특징이고, 내담자는 자신의 존재가 객체화 되는 수동성 속에서, 비록 상담이 성공적이라 할지라도, 사후적으로 문제적 존재라는 부끄러운 실존의 상처를 남긴다고 말합니다. 상담이 일방적으로 도움을 청하는(help me) 형식을 가진다면, (심리)분석은 쌍방향적인 상호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당신이 나를 돕도록 당신을 돕는다(help you help me)’는 형식은 일정하게 나의 자율성이 개입합니다. 상담이나 학습과 같은 일방적인 조언이나 문제풀이 방식이 아니라, 자율적 자기 탐색의 여지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비평에 비해서 (심리)분석은 현실이라는 지배적 체계를 문제 삼지 않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제도교육체제라는 체감할 수 있는 비유를 통해서 말하자면, 상담이 성적향상을 위한 일방적 지도행위라고 한다면, (심리)분석은 성적향상을 위한 분석대상자의 자기 탐색과정을 도와주는 행위입니다. 일종의 자기주도학습능력의 개발 행위 정도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비평은 너와 나라는 2차원적 지평보다 더 큰 3차원적 지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을 도와서 우리를 돕고 나를 돕는다(help them help us help me)’가 비평의 행위인데, 이런 행위는 당연히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환경 전체를 사유하는 방식입니다. 성적향상이 아니라 그걸 요구하는 환경을 조망하고 문제 삼는 방식입니다. 상담이나 (심리)분석이 ‘주고-받는’식의 자본의 교환과 접속되어 있는데 비해서, 비평이 ‘주고-받고-다시주는’ 자본의 교환 형식과 별개의 것인 점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따라서 비평은 상담이나 (심리)분석에 비해 시간적으로 장기적이고, 체계에 대한 질문을 수반하며, 타자성을 향해서 길게 몸을 끌고 나가는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김영민이 말하는 비평은 이러저런 이론들을 뒤적거리는 문학비평으로 대표되는 세속의 비평행위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전혀 새로운 비평을 말하는 겁니다.

 

3-4. 응해서 말하기

‘충고하지 말고, 조언하지 말고, 평가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고’ 공감하라. 줄여서 ‘충조평판’하지 말고 들어주고 공감하라는 것이 새로운 사회적 트렌드처럼 소비되고 있습니다. 이걸 김영민은 ‘응해서 말하기’라고 개념화하고 있습니다. 학생이 말하면 그것에 응해서 말하는 것이 선생의 행위방식의 절대적 표준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거기에 모든 교육학적 이론이 결절해 있다는 겁니다. (교육)심리학에서 다루는 각종 요구(needs) 분석 방법론들 또는 학생들에 대한 각종 심리-능력-적성검사 등이 ‘응해서 말한다’의 하나의 가지들에 해당할 겁니다.

문제는 응한다는 것이 들어 준다는 것인데, 사실은 듣는 능력이 제일 요점입니다. 듣는 귀라는 게 그냥 소리를 듣는 게 아닙니다. 소리 속에 그리고 소리의 배경에 들러붙어 있는 세계 전체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결국 자기 소리를 자기가 듣는 도돌이를 벗어 날 수 없습니다. 듣고 해석하는 행위 속에 이미 자기의 세계관이 반영되는 겁니다. 듣고–해석하는 과정에 이미 ‘판단-평가-조언-충고’가 겹치게 되는, 자기로 환원하여 자기로 되돌아가는 순환을 반복하는 셈입니다. 결국 타자성에 영원히 도달할 수 없다는 비관적인 인간의 불모성에 대한 지적입니다.

‘응한다’는 것이 듣는 것이라면, 결론은 어떻게 ‘잘 들을 수 있을 것인가?’인데,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타자와의 소통의 불가능성, 다른 말로 타자성의 획득에 대한 비관적인 불모성을 벗어나는 것은 지극한 실천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전제해야 합니다. 그냥 쉽게 타자성에 대한 이해가 주어진다면, 그 많은 소통의 방법론 같은 이슈가 세상에 있을 필요조차 없을 겁니다. 죽기 살기로 타자성에 이르러는 노력이 없이는 타자성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도 체계의 기본 환경인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실천이론 - 존재구속성 - 이데올로기 등과 같은 수준의 논의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교사들이 입시위주 교육체제 속의 지식전달의 기능적 존재로 촘촘하게 규정되는 현실에서, 학생이나 학부모가 그런 지식전달의 소비자로 완벽하게 둔갑한 현실에서, 이런 식의 자본주의 체계에 대한 성찰적-비판적 인식에 기반한 교육수행을 요구하는 것은, 현실에서 패배자로 남으라는 요구입니다. 결국 이런 식의 문제의식을 수용한다면, 현실에 대한 어긋내기 또는 체계와의 불화가, 자발적이든 수동적이든 불가피한 상황에 도달합니다. 아마도, 그곳이 ‘응해서 말하기’가 시작되는 지점일겁니다.

 

 

2020. 03. 16.

 

전 남 교 육 연 구 소 (책임작성자 :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