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읽기-영화보기

2. 아메리칸 버티고




4. 미제국주의

A. 로마모델로서의 미국 제국주의

미국을 비추는 방법론으로 로마제국을 언급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미국이 제국을 유지하기위하여 동원할 수 있는 힘은 나머지 세계에 압도적인 군사적 물리력이라고 주장한다.
2차 대전이후 60-70년대 까지 여타 세계에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민주주의를 창조하는 모범을 창출한 시기 이후, 미국은 세계에 대한 정당한 지배력을 상실했다고 주장한다.
구체적 지표로 80년대 이후 미국이 지속적으로 재정적자 상태에 있고(무역수지 적자), 이 적자를 미국은 여타 세계에 대한 제국주의적인 착취를 통해서 해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제국주의적 지배는 워싱턴의 군사력을 중심으로 로스엔젤레스의 문화(할리우드), 뉴욕 금융체제의 보조를 통해서 구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결국 미국도 로마와 같이 과도한 군사력을 지탱할 수 없는 한계지점에 도달할 것이고, 그 지점에서 미국의 제국주의가 붕괴할거라는 분석 모델을 많은 이들이 제시한다.

그러나 레비는 이런 시각을 미국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결여된 낡은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모델은 미국을 정확하게 이해하는걸 스스로 포기하는 거라고 주장한다.
그가 미국이 여타의 제국주의와 다르다는 논거로 제시하는 사례들은 조금은 충격적이다.

구체적인 증거로서 '역사적으로 볼때 미국인들은 영국인이나 프랑스인, 네덜란드인, 스페인인, 그리고 물론 러시아인들에 비해 훨씬 덜한 식민주의자들이었다는 사실'을 든다.
이것에 대한 진위에 대한 판단에는, 다툼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다른 실례들로 '1954년 사우디아라비아의 다란 공군기지, 1966년 프랑스 샤토루 공군기지(드골집권기), 1991년 필리핀 수빅만의 클라크기지'에 대한 철수 요구가 발생할 때마다 미국은 이를 수락했고 군대를 철수 했다고 말한다.
결정적으로 미국의 외부세계에 대한 제국주의적 모습인 것처럼 보이는 군사적 개입이 정복의지가 동인으로 작용한 적이 없고, 지속적 점령으로 귀착된 적도 없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이런 레비의 주장에 대한 반증으로 제시될 수 있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출하는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장 최근 미국의 이라크 침공 조차도 공격에 대한 응수의 성격에서 출발하고, 그 내면에는 고통받는 이라크 민중을 돕고자하는 대중의 선의가 작동한다고 말한다.

이런 레비의 주장들을 접하면서 부시가 이라크 침공에 대한 명분으로 제시했던 '사담독재체제로 부터 이라크 민중들을 구하고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 이식'이라는 주장에 미국사회 전체가 열광적으로 지지하던 2004년 미국의 모습이 보인다.
이 당시 나는 미국 플로리다의 후진 호텔방 구석에 파묻혀 날마다 TV를 끼고 살았다.
그 당시 거의 모든 TV 채널은, 심지어 오락 오락프로그램에서 조차도 이라크 민간정부 선출을 위한 투표가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모습을 스포츠중계하듯 시시각각 보여주고 있었다.
대다수 미국인들은 이 모습을 지켜보면서 대단히 자랑스럽고 뿌듯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 눈에 너무도 낮설게 보인 그런 장면들이 레비의 말을 들어보니 조금은 이해가 간다.

이런 저런 근거들을 들이대면, 미국 제국주의의 가장 전형적인 악행처럼 보이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도,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시킬 수 있는 선의 의지가 일정하게 있었다는 주장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란 없다.
더구나 이 당시는 술주정뱅이에서 하느님의 구원으로 새로 태어난 착하고 순박한 부시라는 이미지가 압도적인 시절이었다.
그러니 대량살상 무기가 테러리스트의 손으로 넘어가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켰다는 애초의 주장이 뻔한 거짓으로 밝혀진 상태인데도, 미국인들 절대 다수는 이라크 전쟁을 미국이 공격 받은 것에 대한 수동적 응수의 전쟁이고, 독재체제의 압재로 부터 이라크 민중을 구원하고자 하는 선행의지에 기인한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다.
순박하고 착한 더구나 멍청해 보이기 까지 하는 부시가 테러전쟁을 명분으로 내세워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제국주의적 침략을 기획하는 영리하고 교활한 짓을 하고 있다는 주장을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부시는 대다수 미국인들에게 미국의 선행을 포장하는 기호로 작동하고, 그럼으로서 이것은 미국 제국주의를 100% 발가 벗은 폭력의 제국주의로 해석하는게 오류 일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서 타자를 지배하고 착취하여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고자하는 강력한 욕망의 모습을 가진 제국주의, 그 전형으로서 로마제국주의적 해석 틀로는 미국제국주의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을 레비는 하는 셈이다.

그래서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B. 비자발적 제국으로서 미제국주의

로마인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던 로마인이라는 표현은 비자발적 제국으로서 미국을 표현하는 적절한 말이다.
이런 표현은 미국이 제국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미국이라는 주체의 능동적인 요구로 부터가 아니라 타자의 요구로 부터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사회를 낳았다는 주장을, 국가와 국가간의 전쟁이 제국의 출현을 불가피하게 한다는 말로 대체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을 이렇게 이해하면 세계 경찰국가로서 미국을 두게 되고, 미국 제국주의는 국가간의 갈등으로 발생하는 전쟁 상태를 최소한으로 규제하여 세계체제의 안정을 확보하는 중심축 역할을 부여 받게된다. 후쿠야마의 이데올로기의종말 같은 자유주의 사상이 이런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세계적 규모의 전쟁상태인 냉전은 자유주의 진영의 승리로 끝났다.
그 결과로 미국은 자유주의 사상을 지킨 최후의 승자이고,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세계에 대해서 지배적인 지위에 위치한다.
이데올로기적인 대립과 갈등이 미국의 승리로 귀착됨에 따라, 이후 세계체제의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상태 유지는 자유주의 최강국가인 미국의 세계 경찰로서의 역할에 의존한다.
세계체제의 안정을 흔드는 갈등이나 혼란은 과거의 냉전시대와 같은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전면적 충돌이 아니라, 지엽적이고 국부적인 패권추구나 사소한 이해관계의 충돌로 부터 발생한다.
그러므로 후쿠야마가 이데올로기 종말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동네 깡패를 적절한 수준에서 통제하고 관리하는 세계 경찰로서 미국의 역할을 정당화하고 요구한다.
동시에 그것은 동네 깡패가 일으킨 분쟁에 대한 국제적 수준의 개입이므로 최소한의 전쟁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더 이상 세계체제에 과거와 같은 양상의 전면적인 전쟁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의 고비마다 이런 해석들은 늘 있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중세적 지배체제를 끝장 낸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나타난 나폴레옹의 국민국가를, 헤겔은 역사의 자기실현이 완성된 최종적 모습으로 보았다.
헤겔의 논리에 따른다면 나폴레옹의 유럽지배로 더 이상의 역사적 격변이 없는 역사의 종말이나 완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후의 역사는 이런 논리가 얼마나 허구적인 픽션인지를 잘 보여 준다.
그러므로 후쿠야마의 논리는 현실지배체제를 정당화 시키는 헤겔적인 허구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역사의 최종적인 완성의 결과로서, 동서간의 이데올로기 전쟁에 대한 자유주의 체제의 최종적인 승리의 귀결로서, 외부 세계가 미국에 세계 경찰의 역할을 부여했고, 미국 제국주의가 비자발적인 제국주의로, 로마인이 되기를 원하지 않은 로마인이 되었다고, 미국이라는 국가를 설명하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 부적절하다고 레비는 말한다.


C. 새로운 문명간의 충돌에 대처하는 제국으로서 미제국주의

이 입장은 냉전 종식 이후 역사가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고 생각한다. 그 새로운 역사란 문명간의 충돌이 전면화하는 시대다. 그 최초의 징후가 9.11테러이고, 이것은 4차 세계 대전의 시작이다. 네오콘의 세계관을 가장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무엘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이라고 말할 때, 미국은 민주주의로 표상되는 서구문명을 야만적인 여타의 외부로 부터 보호하고 지켜내야하는 전사로서 자리 매김된다.
이 입장은 '비자발적 제국'의 입장 만큼이나 정치적으로 우파 지향성을 가지지만, 외부의 타자에 개입하는 욕구에 있어서는 훨씬 강력한 태도를 취한다고 할 수 있다.
9.11테러가 새로운 세계 대전의 시작이라면 이는 생사를 가름하는 결단력이 요구되는 전쟁이 된다.

하지만 역사는 문명간의 충돌 뿐 만이 아니라, 문명간의 상호 교류에도 그 만큼 많이 의존해 왔다는 것이 상식이다.
문명간의 충돌 이론에 기댄 신보수주의자들이 이슬람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하고 있다는 것도 뻔한 사실이다.
9.11테러의 배후로 지목되는 빈라덴을 지원한 아프카니스탄의 이슬람세력중 서구적 민주주의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지지한 세력도 많다.
이런 예로서 레비는 구소련의 제국주의적 아프카니스탄 침략에 맞서 싸운 마수드라는 인물을 내세우고 있다.
이슬람 전체를 서구문명의 대척점에 위치시키고, 서구의 민주주의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이들을 소탕해야 한다는 논리는, 미국 정치현실에서도 이미 파산선고를 받은 바와 다름 없다.

2006년의 미국 총선은 네오콘의 세계관을 쓰레기 통에 처박은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므로 헌팅턴의 관점에 기댄 문명간의 충돌에 대처하는 제국으로서 미국이라는 모델은 더이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미국이 가지는 제국주의 성격을 극단적인 네오콘이 지배하는 미국 제국주의라고 규정하는 것도, 미국을 생생하게 이해하는데 일정한 한계를 노정한다. 그래서 레비는 다른 제안을 한다. (이번 대선이 헌팅턴적 미국이 존재하는지 아니면 그런 미국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것인지 명확하게 드러내 줄 것이다.)

그는 현대 프랑스철학의 포스트구조주의적 인식체계를 미국 제국주의를 해석하는데 활용한다.


D. 다중지배의 표현으로서 제국(중심없는제국)

(여기서 레비가 사용하는 다중 개념은 민중이나, 대중이란 개념과는 상당히 다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포스트구조주의적 용어로 다중은 주류적행위를 생산하는 힘이고, 그것에 의해서 산출된 행위 전체이다. 그래서 수적으로 다중이 필연적으로 많은수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적은 수라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흐름을 규정하는 힘이 있다면 어떤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다중이다)

레비는 네그리의 입을 빌어, "제국이 다중의 출현에 대한 반응이라고 말한다. 제국과 다중은 이 세계의 고유한, 동일하고 유일한 '실체'의 두 가지 속성이다"라고 말한다.

지배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어떤 국가도 아니고, 어떤 국가도 팽창하면서 자신의 제국을 창조할 권력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제국은 다중심적이고, 탈국가적이며, 탈지역화해 있다.

네그리에게서 끌어온 것이건, 프랑스 철학의 성과를 창조적으로 현대 제국을 설명하는데 적용한 것이건 이런 레비의 생각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유용하다.

이런 생각은 제국적 지배체제의 구체적인 물리력이 명확하게 가시적이고, 그럼으로서 지배의 중심과 피지배의 주변으로 경계가 확연하게 단절된 모습을 폐기한다는 측면에서 제국에 대한 이해를 좀더 정치하게 발전시키도록 요구 한다.
그럼으로서 현대의 제국주의적 지배체제에 대한  좀더 사실적인 이해를 높일 수 있다. 좀더 협소하게 말한다면 중심 없는 제국이라는 모델이 미국의 구체적 상황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설명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레비가 언급하는 분열된 채로 세계의 어느 곳에나 편재하는 제국은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다국적 기업, 전지구적 금융체계 같은 걸 지목하고, 앞으로 강화될 제국적 지배의 속성을 가진 후보들로 국제테러리스트조직,  노동조합, 대중여론이라는 형태를 띤 매스미디어를 꼽는다.

제국이 전지구적으로 모든곳에 편재하고, 중심이 없다면, 당연히 미국이라는 국가 내부도 제국적 지배와 피지배 관계로 촘촘하게 짜여져 있고, 미국 외부도 제국적 지배와 피지배 관계로 짜여져 있다.
그리고 제국이 다중을 의미한다면 제국적 지배 관계를 파악하고 이에 저항할 수 있는 여러가지 전선의 설정이 가능하다.
미국 뉴올리언즈의 재앙은 미국내 제국적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드러내는 전형적인 현실이고, 지배와 피지배 관계의 전선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재난 구호자로서 배치된 경찰들이나 주방위군과 재난자들간에 벌어진 공격과 진압은 그 사실을 가장 잘 보여준다.

제국을 다중으로 간주한다면, 제국적 통제로 부터 벗어나는 길은 단순해 보인다.
그건 다중으로부터 이탈하는 길을 가는 것이다.
레비는 그런 징후들을 '차별화의 징표들' '특수화의 징표들'(p.462)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여행중에 대면했던 미국적 주류 생활양식에서 이탈하고자 애쓰는 수 많은 사례들을 제시한다.

레비가 생각하는 미국의 어느 한 부분은 제국에서 미끄러져 이탈하는 탈근대적인 저항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식 생활양식'이라는 낙인 찍인 소 떼 , 아니 양 떼들을 생각하면서, 자신이 이 세계의 나머지 나라들에게도 부과하게 될 어떤 허무주의의 지평을 향해 마치 한 사람처럼 걸어가고 있는 사회에 대한 그 모든 살아있는 반증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미국이 이번 역시 다른 어떤 나라보다 앞서 자신의 캐리커처를 그리기 시작했으며, 또한 벌써 제국이 아니라, 제국에 대한 반응의 중추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중얼거려 본다. 반제국적 '반개혁'이 어쩌면 미국에서 시작되고 있는거라고 중얼거려 본다----"(p.463)

레비의 생각을 수용한다면, 니체로 부터 시작하는 프랑스의 해체주의적 사고방식으로 포섭할 수 있는, 끊임 없이 미끄러지고 이탈하는, 그래서 중심을 해체하는 제국에 대한 저항이 이미 제국적 지배를 무력화하면서 현실에 실재하는 또 다른 다중이라는 설명도 가능하다. 소수자이면서 다수자인 이런 혁명은 결국 또 다른 구조를 산출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구조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힘이 될 것이다.

레비가 말하는 개념으로 제국을 이해하면 내부식민지로서 여성이라는 페미니즘의 주장도 손쉽게 포착할 수 있다. 그러므로 레비식 제국주의 개념을 통해서 지배와 착취의 관계를 보다 다양하고,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다. 현실을 잘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저항 전선을 그 만큼 손쉽게 구상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주류에서 이탈하여 자유롭게 미끄러져 나가는, 수 많은 탈주선들이 아마 그런 저항의 전선이라고 레비는 말하는 것 같다. 제국에 대한 레비의 설명을 따른다면, 주류사회적 행태로 부터 이탈하는 행위는 모두 제국에 대한 저항이다.

cf) 제국주의라는 개념이 제국인 일국중심적 사고라면, 레비는 제국이 모든곳에 편재한다고 가정한다. 결과적으로 미제국주의라는 문제의식이 잘못된 문제설정이라는 말이다. 이런 레비의 주장을 따른다면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은 미국에 대한 저항이 아닌것이 된다. 지배적 금융체제나 지배적 생활양식 등과 같은 다중을 생성하는 그 무엇인가로 부터 이탈하는 것이 제국을 해체하는 방법이다. 윈도우가 제국이라면 리눅스는 일종의 탈주선이다. 이마트가 제국이라면 생협이나 재래시장은 탈주선이다. 국민은행이 제국이라면 지역공동체화폐는 탈주선이다.
이런식의 제국에 대한 이해가 오히려 미제국주의를 은폐시키는, 그래서 전통적인 제국주의적 저항 운동을 약화시키는 사고가 아닐까? 결국 미제국주의를 위한 그래서 미제국주의의 세계 지배를 오히려 강화시키는 이론 아닐까?라는 반론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레비식의 제국에 대한 이해가 제국주의라는 현실을 은폐하는 오류일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주의에 대한 대안적 실천이론을 미시적 수준에서 사고할 수 있는 생산성이 있다. 그점에서 나는 레비를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