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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대기

행복한 눈물 : fuck sam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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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 리히텐스타인 : 행복한 눈물>


'행복한 눈물'을 찾을려고 검찰에서 삼성 미술품 보관소 어딘가를 수색하고 있다고 한다.
이 그림은 로이 리히텐스타인이 그린 그림이다.
리히텐스타인은 팝아트라고 불리우는 현대 미술사조의 흐름속에 있는 작가다.
팝아트는 글자 그대로 '대중미술'이라고 해석한다.

현대 미술의 흐름속에서 보자면 팝아트 이전이 추상미술이다.
추상미술이란 글자 그대로 사물의 구체적 형태를 무너트려 추상화한 미술이다.
이게 극한까지 치달린게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 베넷 뉴먼의 '하나', 잭슨 폴락의 액션페인팅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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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미르 말레비치 : 검은사각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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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넷 뉴먼 : on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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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 폴락 : Autumn Rhythm Number 30 1950년>

위에 있는 그림들 하나하나를 그냥 추상미술이라고 범주화하는 것은 일종의 동일시의 폭력이다.
화가의 문제의식이나, 작품이 놓인 위치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해석을 해 주어야 한다.

이야기의 편의를 위해서 그냥 구체적 형태성을 거부한 추상 미술로 일단 보기로하자.
이런 추상 미술 작품과 제일위에 걸린 리히텐스타인의 '행복한 눈물'을 비교해보자.

제일먼저 떠오르는 차이는 '추상미술'과 '팝 아트'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무거움과 가벼움이다.
추상미술이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을 탐색하고 있다면,
팝아트는 세계를 희롱하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런 차이는 표현기법에서도 드러난다.
추상미술은 유화를 가지고 색을 깊게 깊게 덧칠하는 깊이감이 있다.
그냥 사각형을 그리건, 거기에 줄을 하나 그려 넣건, 폴락처럼 물감을 캔버스에 뿌리건 물감을 캔버스에 반복하고 반복해서 바른다.
캔버스에 투자한 엄청난 에너지에 압도되도록 하는 효과를 노린다.

추상미술은 세계의 형태를 극단적으로 단순화 시키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단순화를 극한까지 밀어 부쳐서 얻어낸 감동은 무엇인가?
그것은 숭고미이다.

진실의 깊이있음, 진실의 무게감, 신의 존재, 삶의 엄숙함 같은 것들을 추상미술을은 보여주고 있다.
극한까지 밀어 붙인 단순함을 통해서 순정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다시 제일위에 걸린 리히텐스타인의 '행복한 눈물'을 보자.

실소가 터져 나오지 않는가?
저것도 예술작품이라고!(2002?년 경매가가 700백만불 우리돈으로 70억인데 지금은 서너배 오른 3-4백억이란다)

팝아트 예술가들이 표현하고픈게 바로 그거다.
추상미술이 가지고 있는 무겁디 무거운 세상에 대한 인식을 뒤집고 싶은거다.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야!
세상은 단지 이미지일 뿐이야!
자본주의 대량생산 산업사회는 복제가 진실이야!
원본, 진짜, 진실 이런것들이 오히려 허구야!라고 반박하는거다.

'행복한 눈물'의 원본 그림은 당시의 대중적인 만화의 컷이다.
만화의 컷들을 리히텐스타인이 캔버스에 물감으로 옯긴거다.
그것도 가장 저속하고, 세속적인 컷들만을 그렸다.

표현기법도 가볍기는 마찬가지다.
픽셀을 사용한다.
점으로 형태를 완성하는 거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디지털 이미지가 픽셀로 된 이미지다.
50여년 전에 이미 리히텐스타인은 현대라는 일상속에서 경험하는 이미지가 단지 점들의 집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거다.

추상미술의 진지함이나 무거움을 이런식으로 팝아트 예술가들은 조롱하고 있다.
진실은 단지 복제이다.
사물의 실체와 같은 깊고 깊은 진실이란 없다.
진실은 얕은 표면을 떠다니는 이미지일 뿐이다.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실제는 대량으로 복제된 가상이다.
그것이 오히려 진실이다.
사물의 형태조차도 단지 점들의 집합이다.

예술(미술)조차도 만화의 컷 정도에 불과하다.
예술(미술)에서 진지한 엘리트주의 같은 걸 거부한다.
예술(미술)을 대중과 함께 숨쉬게 하자.

리히텐스타인의 '행복한 눈물'은 이런 선언이다.

이걸 삼성이 70억이라는 거금을 주고 사들였다(?)

삼성은 한국 최고의 엘리트주의를 표방한다.
삼성은 노동조합을 구성하는 노동자들의 무식함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절대 노동조합 같은 무식한 놈들하고는 상대할 수 없다.
무노조 삼성은 절대로 깨뜨릴 수 없는 성역이다.
어디서든 일등 삼성은 절대적인 명제다.

이런 삼성이 미술품을 수조원어치 사들였단다.
그중에 하나가 '행복한 눈물'이네 아니네 하면서 온나라가 시끄럽다.

이렇게 사들인 미술작품들의 일부를 폐쇄된 공간에 비밀리에 관리하고 있고, 일부를 '리움'이라는 미술관에 전시하고 있다.
남산 뒤쪽에 으리으리하게 있는 리움은 그 자체로 나는 최고엘리트 귀족이다라는 선언처럼 느켜진다.
접근할 엄두가 잘 안난다.
모르긴 해도 관람이 쉽지 않을거다.
언젠가 근처에 갔다가 주변에서만 얼쩡거리다 그냥 온 기억이 있다.

삼성의 이런 처사는 '행복한 눈물'이라는 예술작품에 대한 모독이다.
삼성의 이런 처사는 모든 예술작품에 대한 모독이다.

모든 예술작품은 그 시대의 절대적 가치를 흔들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 젖히는 전위성을 가진다.
전위성이 없는 예술은 예술이 아니다.
탈시대성이 예술의 기본정신이다.
그래서 시대로 부터 비웃음거리가 되곤하는 그들을 어떻게든 살리자고, 선진국들은 각종 재정지원 정책을 하는게 아닌가!
그게 결국 사회전체를 위한 일이라는 것을 아는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모든 예술작품은 그 시대와의 지난한 투쟁의 생산물이다.
그래서 모든 예술작품은 그 시대의 모두에게 자유롭게 공유되어야 한다.
예술작품을 한갖 물질적 재화의 증식 수단으로 사용하는 처사는 모든 예술작품에 대한 모독이고, 지난한 투쟁으로 그것을 생산한 예술가에 대한 모독이다.

만일 삼성이 '행복한 눈물'을 구입했다면,
그것은 에술에서 엘리트주의를 몰아내고 대중성을 숨쉬게하고자 한 리히텐스타인의 정신하고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삼성의 '행복'이고, 대중의 '피눈물'이다.

만일 삼성이 수조원어치의 미술작품을 구입해서 리움에 그리고 비밀장소에 물질적 재화의 증식수단으로 소유하고 있다면, 차제에 그걸 대중의 품으로 어떻게든 돌려 놓는게 그 예술작품에 그리고 지난한 노력으로 그걸 생산한 예술가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 팝아트의 대표작가 : 앤디워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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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이 글에서 사용된 미술작품에 대한 지식은 대부분 진중권의 미학강의에 근거하고 있다. 그림 이미들은 여지저기서 퍼온 것이다. 추상표현기법의 일종인 잭슨 폴락의 물감뿌리기 작품생산기법은 나중에 퍼포먼스라는 행위예술로 변형된다. 잭슨 폴락을 다른 추상표현작가들과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 그 점은 위에서 추상표현작가로 뭉퉁그려서 묶어논 뉴먼이나 말레비치도 마찬가지일거다. 하나 하나의 작가들이 서로 차이나는 문제설정을 하고, 서로 다른 시대적 고민에 위치한다. 그래서 모든 범주화는 차이를 무화시키는 폭력이라고 한다. 박지원과 정약용을 그냥 실학파로 묶어 놓으면 그 둘이 동시대를 어떻게 다르게 살았는지 삭제돼 버리는 것과 같은 폭력을 저지른다(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고미숙). 결국 이 글은 단지 추상과 팝아트는 어떻게 다른가라는 비교를 위한 편의적 관점에서 폴락, 뉴먼, 말레비치를 묶었다. 예를 들어 같은 추상화가라는 모네의 작품들은 순간의 빛의 산란이 사물을 시시각각으로 다르게 보이는 모습들을 포착한다. 무거운 숭고함이 아니라 가벼운 놀이처럼 사물을 포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