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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대기

축구민족주의 또는 국가주의

2002년 월드컵때 있었던 일이다.
16강 진출 어쩌고 하던것이 8강 하면서 분위기가 확 달아올랐다.
그 당시 인문계고등학교 3학년 담임이었는데, 자율학습 때려치고 집단시청하라는 오더가 내려왔다.
그것도 운동장에 대형 디스플레이어 설치하고 빨간 셔츠 입고 함께 응원하란다.
우리학교 만이 아니고 같은 지역에 있는 이웃학교들이 다 그렇게 한단다.
그래서 우리 학교도 운동장에 떼거지로 모여서 함께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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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그린 그림)

그날 나는 한국판 파시즘의 한 장면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축구를 그저 축구로 즐기는게 아니라, 현실속에서 억눌렸던 욕망을 한국상대팀 이라는 타자에게 분출하고 있었다.
그런 집단적 군중 심리를 빌미삼아, 운동장 여기저기서 소외되고 약한 아이들에 대한 미세한 폭력현상이 벌어졌다.

순간 이건 아닌데라고 필-이 왔다.
형용 모순인 '타율적 자율학습'이란것 자체에 불만이 있었는데, 잘 됐다 싶었다.
그래서 4강 경기때 반 아이들한테 내 입장을 설명했다.

'축구는 그냥 축구다.
그러나 축구가 더 이상 축구가 아닌것이 되었다.
나는 오늘 축구 안 볼란다.
내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은 나하고 같이 놀자'

순간 교실에 찬물을 확 끼얻은 듯한 썰렁한 분위기가 돌았다.
남학생 몇놈이 비애국적행위 어쩌고 식의 불만을 드러내면서 투덜거렸다.
그냥 무시하고 종례 끝내고 나 왔다.

교무실에 돌아와 같이 놀러갈 아이들을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절망감 비슷한 감정이 일었다.

그날 아이들의 태도에 대한 내 해석

'전반적인 분위기가 타자에 대한 증오에 기반한 파시즘적 분위기가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자율학습하지 않고 운동장에서 마음껏 노는 난장이 좋다.

한국 팀을 응원하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당연한 애국심의 표현이다.

선생님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러나 응원에 빠지면 다수에게 보복당한다.
나는 약하다.'

어떤 경우든 이들이 실제 파시즘 사회가 도래한다면 그것에 정면으로 맞설 개연성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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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르벤베르크 나치당 전당대회 모습)

한국사회의 박정희식 파시즘은 강고한 토대를 가지고 있다.
재벌체제로 대표되는 경제체제도 그렇고, 양극화에 내몰린 의지할데 없는 민중들도 적절한 계기가 주어지면 민족주의나 애국주의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파시즘에 자신을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데올로기적 주체를 생산하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학교라는 곳이, 일본제국주의적 파시즘과 박정희식 파시즘이 아직도 전일적으로 관철되는 장소라는 현실을 감안하면, 한국사회가 파시즘화 될거라는 우려가 과장된 단순화 일까?  우리는 근대사회 성립이후 일제시대에도, 해방이후에도 파시즘의 씨앗을 지속적으로 뿌려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과장된 호들갑일까?

지금도 행사때마다 아무런 비판없이 행해지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한번 생각해 봐라. 세계 어느 나라도 그런 파시즘적 맹세를 공식의례 때마다 읍조리지 않는다. 심지어 군군주의적 파시즘체제의 원조인 일본에서도 공식의례에서 일본국기 게양 조차 맘대로 못한다. 여기 저기 히노마루 사용에 대한 내부 비판들이 있다. 일본 극우주의자들의 소원이 일본국기인 히노마루게양을 공식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태극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국기에 대한 맹세가 모든 공식행사에 따라 다닌다. 아무도 이것이 가지는 문제에 대한 비판의식도 없다. 우리 사회가 파시즘적 정조에 대한 저항력이 전무하다는 반증 아닌가?

나는 이번 대선에서도 이회창, 이명박, 정동영, 문국현, 심지어 권영길까지 파시즘으로 금방 변질될 국가주의에 포박되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이 내건 모든 구호는 국가의 부강으로 수렴 되었다. 단지 그 방법론만 조금씩 다를 뿐이었다. 소위 진보정당이라는 민노당의 권영길마저 '코리아연방 공화국'이라는 깃발을 제일 앞에 내걸었다. 이 정도면 진보 국가주의 파시즘이 아니면 무엇인가? (이런말이 있나! 하긴 신자유주의 좌파 정권 이라는 분열증적 용어도 쓰이는 판국 아닌가! ) 북한의 강성대국과 어떻게 다르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사회당 금민후보를 지지했다. 그나마 그는 평화국가, 평화헌법을 말하고 있었다.

한국사회에서 파시즘에 오염되지 않은 현실정치세력도 거의 없고, 개인들도 거의 없다. 아득한 현실이다.
 
이번 대선 결과는 그런 현실의 정확한 반영이다. 2002년의 이상한 광기에 휩싸인 축구 민족주의 형태로 잠깐 그 모습을 보였던 한국판 파시즘은 언제든 현실화 될 수 있는 토양을 가지고 있었고,  이명박 정권의 출현으로 그것의 현실화 가능성을 열었다.

이 땅에 진짜 진보주의자들이 있다면 파시즘과 어떻게 맞설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런 내 진단이 현실에 대한 과잉 단순화로 인한 오류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cf) 글을 쓰고 나서 네이버 이미지 검색에서 '히틀러'라고 쳐 보았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히틀러가 그렸다는 그림들이 쭉 나왔다. 그가 그린 그림들은 위에 게시해놓은 그림처럼 정확한 원근법에 근거해서 균형과 비례의 아구가 딱 맞아 떨어지는 그림이 대부분이었다. 마치 칸트나 헤겔의 정연한 형이상학 철학체계 처럼 보인다.
 
진중권의 '미학강의'에서 배운건데, 이런식의 회화를 고전회화양식이라고 한단다. 고전회화 양식에서는 사물의 이데아적 실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회화의 목적이었다고 한다. 사물의 이데아를 추구한다는 것은 '절대적 진리'를 추구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순수 절대 진리' 어쩌고 하는 놈들은 필연적으로 그것으로 이질적 타자를 억압하는 파시스트가 되는건 정해진 수순이다. 근대이성의 기획이 자기로 동일성이 확보 되지 않는 타자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한 세계 1,2차대전으로 귀결된 것은 피할수 없는 결과였다.

히틀러체제 내부만 보더라도 게르만민족의 순수성을 훼손한다고 독일사회의 이질적 존재인 유대인들을 600만명을 죽였다. 이 과정에서 인종적 우생학이라는 과학적 이성의 기획으로 유대인뿐만 아니라, 수 많은 종류의 장애인, 부랑자, 유랑민족 같은 사람들을 거세하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였다. 이런 근대이성의 폭력이 저 그림속에서 읽혀지지 않는가?

두번째 사진도 첫번째 그림과 유사하기는 마찬가지다. 절제있고 질서있게 짜여진 도열된 병사들과, 그 한가운데를 가르며 걸어가는 당당한 히틀러의 모습에서 차라리 엄숙한 숭고미가 느켜지지 않는가? 그 엄숙한 숭고미속에서 독일 민중들은 무언가 절대적 정의를 실천하고 있다고, 감동적으로 느켰을 것이다. 파시즘을 지지했던 많은 지식인들, 특히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는 '조국을 위한 개인의 죽음을  전체의 생존으로 귀속시키는 죽음을 찬양하는 논리'로 독일의 젊은이들을 전쟁의 전선으로 보내는데 앞장섰다.

이런 독일 지식인들과 한국 근대 계몽기의 지식인들의 사유체계의 유사성을 우리는 한번도 반성적으로 성찰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신채호의 그 과도한 민족주의는 곧바로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전화할 수 있고, 이광수의 계몽주의는 결국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찬사로 표변하지 않았는가.

한국의 근대성립 이후, 한국의 민족주의는 단지 피해자로서의 민족주의라는 알리바이로, 그 내부에 필연적으로 잠재되어 있는 타자에 대한 폭력성을 한번도 제대로 점검하지 않고 현재까지 왔다. 우리안의 파시즘이 점검되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그 잠재된 파시즘적 성격이 현실화될 수 있다고 우려해야하지 않을까?

(히틀러가 쓴 '나의 투쟁'에 보면 그가 오스트리아 시절 화가 지망생으로 활동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