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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경치

촛불이 실패한다면!



조중동이나 이명박 정부의 촛불광장에 대한 탄압이 최소한의 합리적 이성도 잃었다.
우파에서도 가장 극우적이고, 비이성적인 폭력노선 따라잡기를 하는게 눈에 보인다.
조갑제는 총을 쏘라고 풀무질을 해대고 있다.

기본적으로 공격성은 공포 심리의 발현이라는 설명이 있다.

우파의 광장에 대한 공포는 어디서 기인하는가?
규율과 규제가 없는 자유분방함을 두려워한다.
파시즘은 불감증 환자들의 오르가즘에 대한 공포라는 해석이 있다.
2차 대전후 독일 나치즘에 대한 연구자들의 분석이다.
독일 (Neo Left)신좌파의 사회심리학 계열에서 주로 이런 주장들이 나왔다.
대표적인 사람들로 에리히프롬, 라이히, 아도르노 같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주로 프랑크푸르트를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프랑트푸르트 학파라고 말한다.
우리 나라에는 90년대 초반에 집중적으로 소개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나치즘 이전의 독일사회의 역동성에 질겁을 한 대중들이 파시즘을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나치즘 이전의 독일 사회는 좌파의 사회적 진출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다.
사회주의 계열의 자유분방한 역동성에 질겁을 한 보수적 요구가 독일 파시즘의 뿌리라는 거다.
다른 말로 파시즘은 약한 개체들의 자기보호책인 측면이 있다.
질서있는 규제를 통한 안정에 대한 욕망이 파시즘적 욕망의 근거일 수 있다.

당시에는 이런 설명들이 우리사회에 대한 해석틀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요즈음 독일 파시즘에 대한 신좌파의 해석틀이 우리사회에 필요한 시기가 도래했다는 막연한 느낌 같은 것이 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파시즘의 도래를 경계해야한다고 생각했었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이명박의 허접함을 보고, 이명박 정부가 얼마 못 버틸것 같았다.
근데 촛불시위를 지켜보면서 한국사회가 파시즘에 경도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슬슬 다시 생긴다.
만약 촛불시위가 실패한다면 대중들이 철저한  사회적 규제와 억압을 요구할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
그건 새로운 파시즘으로의 입구가 될 것이다.

촛불광장은 다중들이 억압된 욕망을 분출하는 장소다.
종교문제, 언론문제, 과거사청산문제, 교육문제, 대운하문제, 공공영역의 사유화문제, 정치적 대의제시스템 등 호출되지 않는 영역이 없다.
심지어 언더그라운드 문화적 욕망까지 등장한다.

이런 분출하는 욕망은 기본적으로 억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걸 광장으로 호출해서 자유롭게 풀어 놓는다.
이건 일종의 섹스행위다.
타자와 타자가 만나 서로 소통하고 그걸 통해서 오르가즘과 같은 쾌감을 느낀다.
광장에서 사람들은 어느곳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따뜻한 연대감을 느낀다.
개체를 뛰어넘어 나와 타자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특별한 소통의 경험을 한다.

변화에 대한 자신이 없는 기득권 약자들은 이걸보고 질겁을 한다.
조갑제가 촛불광장이 성폭력의 난장판이라고 말하는건 파시즘에 대한 요구를 본능적으로 표출한거다.
이걸 조중동이 그리고 정권이 따라간다.
이런 흐름은 파시즘적인 욕망이다.
다중들의 분출하는 욕망을 어떤 규제속에 철저하게 가두어 두고자하는 심리다.
욕망의 흐름을 제어하고 표준화하고 제도화하고 통제하자는거다.

현장에서 한눈으로 쓱 훌터보면 이들의 상징이 파리한 노인들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생명력이 죽은 약한 개체라는게 분명하다.
약동하는 리비도적 생명의 정조가 아니라 타나토스적인 죽음의 본능에 지배를 받는 정서를 가지고 있다.
파시즘은 이런 타나토스적 죽음 본능의 사회화다.

이런 극우세력들이 촛불시위를 법치를 무시한 난장판이라고 말한다.
이걸 잡기 위한 힘으로 경찰과 검찰이라는 법률적 규제장치가 동원된다.
현실을 죽어있는 정적인 상태로 유지하고자하는 반리비도적 열망이다.

촛불이 실패한다면 분출하는 다중의 욕망을 가두어 두려는 시도들이 대중의 지지를 받게될거다.
거기가 파시즘의 입구다.

cf) 시청앞 광장에서 놀다가 자정 넘어 일행들과 함께 대절한 버스로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촛불이 실패한다면 이라는 의문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