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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경치

진보신당 : 민노당

어디서부터 말해야할지 모르겠다.
먼저 한달여전 민노당 당원 신분을 개인적으로 정리했다는 입장을 밝힌다.
민노당 정리 이후 이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흐르는지 촉수를 뻗어 더듬어 보았다.
아무런 흐름이 감지 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직접 아는 몇몇을 찾아 다니며 의견개진을 해 보았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지금 움직일 때가 아니라는 의견들이 대부분이었다.
내 감수성과는 확연히 다른 판단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확인했다.

갑갑증이 생겼다.
그래서 이글을 쓰기로 작정했다.

1. 시기의 문제

지금 당장 민노당 탈당의 흐름을 만들자는 의견에 대한 반론으로 제기되는 가장 큰 이유는 때가 아니라는 거다.
먼저 때를 기다리자는 의견이다.
때를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여러수준의 판단이 중첩돼 있는데, 그중 가장 큰 논리는 현실적으로 4월 총선에 대한 역량집중이 훼손된다는 생각이다.

이런 판단에는 분열은 자멸, 또는 역량의 약화라는 공인된 인식이 작용하고 있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흔한 상식이 이런 논리를 뒷 받침한다.
이런 흔한 상식적 언명을 모든 상황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가?
보수가 부패하지 말라는 말도 보수의 기득권을 유지해야 한다는 '현실보수기득권'세력의 논리이고.
진보가 분열하지 말아야 한다도 말도 '현실진보기득권'세력의 논리 아닌가?

이런 논리를 무조건 따른다면 현실의 변화는 어디서도 상상할 수 없다.
있는 그대로의 정치지형을 흔드는 행위는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논리다.
 
그냥 딱 까놓고 보자.
이런 논리를 보수 진영은 한나라당이  다른 극우정당인 자유선진당을 비판할때 사용한다.
소위 진보 진영은 민주당이나 민노당이 여타 진보의 분열적 흐름을 비판할때 사용한다.

우리 피부에 각인되고, 혈관의 피속 세포 하나하나에도 새겨진 구호가 있다.
언제나 주류적 운동에서 이탈하고자 할때 마다 발목을 잡았던 구호가 있다.
결과적으로 운동의 다양성을 훼손하고, 운동의 다양한 흐름을 현실권력의 획득이라는 방향으로 결집시켰던 구호다.
상층 몇몇 운동가들이 운동의 결과물을 따먹고 대중은 그 결과에서 소외시켜 운동의 진정성과 풍부한 내적 분화 역량의 발전을 가로 막은 구호가 있다.
결국 한국 진보운동이 오늘날과 같이 궁핍하고 초라하게 만든 구호가 있다.

'대동단결'

이거 아닌가?
이거 때문에 그 때 그시기에 나는 생각이 좀 다른데, 나는 다른 시도를 해보고 싶은데, 라는 욕망을 억압당하고 여기까지 온거 아닌가?

개인적으로는 대동단결의 수혜자이고, 대동단결의 과실을 따먹은 입장이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 대동단결은 생산적이기 보다, 운동의 역량을 훼손한다는게 현실이 되었다,고 본다.

그냥 단순하게 질문해보자!
자기배신 없는 변화가 어떻게 가능한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끊임없는 자기 배신아닌가?
내가 어제와 오늘이 같다면 그건 죽은것과 무엇이 다른가?
생성과 변화가 지속적 일관성 보다 생명의 일차적 속성 아닌가?

진보건 보수건 끊임없는 자기배신의 역사다.
일관성을 추구하는건 항상 기득권적 생명의 양상이다.

기득권으로 부터의 이탈을 따라다니면서 새로운 사회적 변형이나 사회적 권력이 발생한다.
이게 경사도가 가파를때 혁명적이라고 하지 않는가?

백번 양보해서 4월 총선을 위해 대동단결한다는 것에 동의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새로운 진보적 분열을 뒤로 미룰 이유가 어디 있는가?
총선을 위해서 역량을 집중하는 것과 분열을 위한 논의를 시작하는것이 배리의 모순적 관계인가?
그 두개를 동시에 진행 할 수는 없는가?
제 세력간의 정치적 타협을 통해서 총선에 집중하는것은 그것대로 진행하고, 분열적 흐름은 그것대로 진행할 수 없는가?
분열적 흐름속에서 발생하는 정치역량의 다양화가 4월 총선에 대한 대응력을 강화시킬 경로를 구상할 수는 없는가?

오히려 지금과 같은 협소한 진보정치지형을 대동단결로 묶고 4월 총선에 집중하는게 수세적이다.
오히려 작동 가능한 정치역량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을거다.

대중들은 그런 정치적 판단을 본능적으로 안다.
승부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표방지 심리를 작동시킬거고, 결과는 협소한 우리들의 잔치로  끝난다.
이게 수십년간 우리들이 반복한 방식 아닌가?

4월 총선을 위해서도 분열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조직할 필요가 있다.
분열을 조직하면서도 총선에 대한 효과적 대응을 고민한다면, 그런 길이 있을 것이다.
이걸 애초부터 배제하지 말자!

그런 시도를 아예 싹을 자르는 행위는 진보세력의 자기역량의 한계를 세상에 고백하는 고해성사와 다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분열이 가져올 가능성을 충분히 논의하고, 현실에 그것을 접목할 개연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한다면, 그때 그렇게 방향을 잡아도 늦지 않을거다.

2. 노선정리의 문제

지역사회건 중앙이건 민노당이 다양한 정파간의 연합체적 성격을 가진 정파연합을 지향한 정당이라는 주장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민노당이 민족문제를 중심적인 의제로 설정하고 있는 정파(이하 '민족정파')의 헤게모니가 작동하고 있었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민노당이 계급 노동 생태 이주민 문제 등에 무관심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그런 문제들에 헌신적으로 역량을 배분할려고 애쓴걸 가까이서 지켜본 경험도 있다.

이번 기회에 그걸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민족정파의 생활정치라는 정치행태가 다른 사회운동 부분의 역량강화나 다양화를 가로막은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민족정파가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여타 사회운동 진영은 민족정파의 헤게모니 장악기도로 받아들인게 의심할 수 없는 현실이다.
중산층적 시민운동으로 분화해간 여타 정치세력과 민족정파를 제외하면 변변한 정치세력이 소멸한게 현실이다.
이걸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번 분열흐름을 새로운 다양한 정치세력을 만들어 낼 창조적 상상력을 구상해 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이라도 분열을 전제로 민족정파가 다 끌어안고 있는 다양한 운동들을 해체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각개 약진을 조장할 필요가 있다.
단기적으로 왜소한 난장이들로 떨어져 나가는 걸 감수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민족정파의 문제의식이 해체되는 걸 피할 수는 없다.

김대중 정권 이후로 민족문제가 한국사회에서 더 이상 진보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건 분명한 현실이다.
힘들고 아프다할지라도 이걸 민족정파도 수용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민족문제는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지배기득권의 강화 이데올로기로 전환되었다.
한반도에서 자본의 논리는 필연적으로 좀더 큰 민족통일 국가를 지향한다.
그게 현실적으로 성장의 정체에 몰린 자본의 가장 효과적인 탈출구가 되었다.
지속적인 이윤율 하락을 벗어나는 가장 손위운 길은 식민지 개척 말고 다른 무엇이 있는가?
서구 선진국들이 한번씩 다 거친 자본주의 역사의 선명한 한 단면 아닌가?

자본은 더 큰 시장을 위해서 영토확장이라는 논리를 누구 보다도 더 필요로 한다.
현실적인 힘으로서 구현된 한반도 통일은 남한 사회의 확대 재생산이라는 결과를 피할 수 없다.
역설적으로 현단계에서 분단의 고착화와 확고하게 분단된 두 국가의 평화체제가 더 절실하다.
어떤 형태의 통일 운동이라 할지라도 모순적으로 자본의 도구가 되는 현실의 힘을 피해갈 수는 없다.
모든 통일지향이 자본의 자기강화 운동의 시녀가 되는 모순을 피할 수 없다.
모든 통일모색은 자본의 하위 파트너로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남한 만의 경제력으로도 세계 10대 강국인 현실이다.

변화된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통일이 제국주의 피해자로서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근대성의 완성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통일이 제국주의적 억압을 극복한 해방과 자유의 확대라고 말할 수 없다.
현실적인 힘을 고려한다면, 어떤 형태의 통일운동이든 북한에 대한 제국주의적 접근을 도와주는 자본의 강화 운동 기능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결국 노선 정리의 문제는 장기적 관점에서 민족정파적 세계관이 보수진영으로 재편되는 걸 피할 수 없다고 본다.
단기적으로는 서로의 차이를 허심탄회하게 인정하고 분열하든지, 아니면 최소한으로 분열을 전제로 정파연합적으로 총선에 대응할 수 밖에 없다.
이런 기본적인 동의도 없이 총선전까지 무조건 대동단결하자는 주장은 현실에 대한 기만이다.

결국 현실을 급진화하는 진보는 계급운동, 생태운동, 문화운동, 각종 소수자 운동 등이 새로운 정파적 연합을 꾸리거나, 분열적 모습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이걸 서로 인정하고 총선에 대응하는 것이 그나마 존재하는 진보역량을 결집해내는 통로일 수 있다.
총선에 임하는 모든 정파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차이가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고 그 토대위에서 어떻게 연합하고 분열할지를 상상해야 한다.
지금까지 처럼 그냥 형님, 동생 이러면서 갈 수 는 없다.
끈적 끈적한 감정에 호소해서 언제까지나 서로 질질 끌려 다니는 것은 서로를 갉아먹는 길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현실은 당장 요동치고 있다.
이런 흐름은 쉽게 오지 않는다.
총선을 위해서 모든 논의를 중지하고, 총선에만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논리는 너무 수세적이다.
그런 자폐적 상상력으로는 총선도 망치고, 총선 이후도 망친다.

현실을 다시 쓰고,
역사를 다시 쓰고,
우리 자신을 다시 만들 기회다.
이런게 기회 아니라면 무엇이 기회인지? 나는 그걸 묻고 싶다.

cf) 이 글은 전남 서남권에 한정하여 읽히고 해석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