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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먹고놀기

자본으로 부터의 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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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 탈주.
르네마그리트라는 사람이 그린 그림이다. 초현실주의자라는 유파에 속하는데, 시뮬라르크를 즐겼다고도 말한다. 초현실주의자라는 말은, 정현하게 정리된 실재세계의 의미와 그 배후의 의미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애쓴 화가들이라는 말이다. 시뮬라르크라는 말은 실재의 재현이 아니라, 가상-가짜의 세계라는 말이다. 현대의 세계를 시뮬라르크의 세계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재로 우리가 접하는 사물의 대부분은 실재가 아니라 미디어를 통한 이미지들이다(미술에서 시뮬라르크적 기법을 처음 도입한 사람들은 인상주의 화가들이다. 이들은 고전주의의 사물에 대한 정확한 재현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순간의 빛의 산란으로 사물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래서 한 사물을 보는 시간에 따라서 다르게 수십장을 그렸다).
그림이 주는 정조는 제목이 암시하는 탈주와 달리, 말달리는 사나이가 숲이라는 세계에 끝없이 포획되어 있을것 같은 느낌을 준다. 탈주가 아니라 포획이라고 제목을 붙여야할 것 같다. 비슷한 그림이 여러장 있는데, 기수가 모두 왼쪽을 향하여 고집스럽게 달리고자하는 이미지다. 왼쪽은 서양이건 동양이건 주류에 대한 저항이다. 결국 그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아무리 현실이 강고해도 그것에 저항하는 것이 삶의 본질이라고 말하는것 같다.
보다 큰 사진은 왼쪽마우스를 사용못하게 해놔서 못 퍼왔다. 출처는 사진 오른쪽 하단에 있다.
------ 진중권의 미학강의에 기반해서 풀은 썰이다 --------


자본으로 부터의 탈주

우리는 자본의 지배속에서 살아간다.
우리의 일상에서 자본에 영토화되지 않은 부분은 거의 거의없다.
심지어 우리가 매일 마시는 물도 90% 이상 자본에 영토화되어 있다.
물이 어떻게 자본에 영토화되었는지 한번 생각해보라.

20년전쯤만 거슬러 올라가 보자!
그당시만해도 물이 자본에 영토화된 부분은 겨우 수돗물정도였다.
설사 수돗물이 자본에 포획되어 있다할지라도 지금과는 그 정도가 달랐다.

현재 물이 자본에 포획된 정도를 그때와 비교해보자!
시골에 사는 나 같은 사람도 수돗물을 공급받는다.
음용수는 어떤가.
예전에는 음용수가 별도로 시장에서 교환되는 재화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모든 음용수들은 돈주고 교환해야한다.
깊은 오지 시골학교인 우리학교도 모든 음용수는 회사의 관리를 받는다.
유희로서 사용되는 물은 어떤가.
레프팅이건, 수영이건 모두 돈으로 교환해야하는 대상이되었다.

자본은 이렇게 끊임없이 세계에 대한 식민적 영토화를 추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본으로 부터 탈영토화된 삶을 꾸릴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하다.
우리의 존재를 규정하는 무수한 환경들이 자본으로 영토화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본으로 부터 자유로운 유토피아-이상향은 어떤 모습일까?

단어 utopia를 한번 보자
u가 영어에서는 un이라는 접두사로 쓰인다. 풀이하면 없다라는 뜻이다.
우리가 잘아는 unhappy, unknown, unkind, unable--- 등 수도 없이 많은 용례가 있다.
topoia는 영어에 topos라는 말로 남아 있는데 이건 '익숙한  장소' '익숙한 주제' '익숙한 개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utopia는 '익숙한 장소, 익숙한 주제' '익숙한 개념' 과 같은 것들은 이 세계에 '없다'라는 뜻이다.
이상향이라는 존재 자체가 낮설음이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자본으로 부터 자유로운 이상향 유토피아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낮설움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지금 없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낮설움으로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적 포획으로부터 벗어난 삶이란 낮선 어떤것이다.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친숙하고, 뻔한 것으로는 절대 구성될 수 없다.

그래서 자본주의적 포획으로부터 벗어날려는 모든 운동은 이질적 타자성을 가진다.

어디선가 이런 문장을 읽었다.
'나를 가장 기분나쁘게 자극하는 책 그게 가장 좋은 책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나를 가장 껄끄럽게 만드는 존재, 그게 가장 자본주의적 포획으로부터 이탈된 존재다'

내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낮선 존재로 생각한다.
그 만큼 내 삶이 유토피아적이라는 거다.

이 글은 나를 나름대로 정당화하기 위해서 풀은 썰이다.

날씨도 춥고, 심심하니 별 시시껄렁한 썰이 다 나온다.
어디 술이나 먹으로 가야겠다. 끝.

cf) 예전에 '아메리칸 버티고'라는 책을 읽었다. 맨 뒤부분에 저자가 미국이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시스템에서 이탈하고 있는 징후들을 제시하는 부분이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그런 징후들은 미국의 주류적 삶의 방식에서 벗어난 삶의 양태들이다. 나는 저자가 제시하는 그런 이탈의 양상들이 너무 미약하고, 여전히 미국이라는 체제에 갇혀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이정우교수의 강의를 듣고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든 탈주선은 체제내에서 그려질 수 밖에 없단다.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탈주는 없단다. 그래서 들뢰즈는 우리 모두가 자본과 모의해서 타협하고 있는 존재라는 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단다. 탈주는 들뢰즈식으로 말해서 공재면 또는 탈기관체로의 이동은 기존의 유기체와의 대비 속에서만 상상할 수 있고, 가능하단다. 띠옹. 너무 너무 현실적인 들뢰즈. 백이숙제가 그를 만났다면 아마 죽이려들었을것 같다.

들뢰즈는 나를 너무 많이 닮았다. 그래서 나는 내 자본주의적 천박성을 버리지 않아도 된다는 정당성을 확보했다. 띠옹.
또 나르시즘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