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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인의 몸


기원전 1,5000년 - 10,000년. 프랑스 콩드 공프. 구석기시대 그림


1. 기관없는 신체.
위의 그림은 구석기 인류가 그린 그림이다.
역사이전인 선사시대 인류의 그림이다.
이런 정도의 사실적 표현은 역사가 시작된 이후 예술사에서 수천년 정도가 지나야 나타난다.
역사의 시작이란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때를 가리킨다.
역사의 시작을 문명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문명인류가 수천년 지나야 겨우 이런 정도의 사실적 표현기법을 흭득한다.
대개의 경우 문명, 즉 역사의 시작이란 신석기시대를 가리킨다.
역사 이전인 선사와 역사이후의 시대구분을 가르는 특징은 수렵시대에서 농경시대로의 전환이다.
선사가 수렵이라면, 역사시대는 농경의 시작과 함께한다.
인간의 개념적 인식은, 추상적 인식은 농경을 시작하면서 발달하기 시작한다.
개념이란 언어이기 때문에 선사는 언어를 가지지 못했고, 역사시대는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대다.

그런데 역사 이전인 구석기인들이 어떻게 이런 놀라운 사실적 표현을 할 수 있었을까?

기관없는 신체란 들뢰즈의 사유중에서 가장 기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기관이란 감각을 받아 들이는 감각기관을 가리킨다.
청각기관, 시각기관, 미각기관, 후각기관, 촉각기관 같은 오감을 받아들이는 기관이다.
이렇게 감각을 오감으로 질서 정연하게 분류한다는건 벌써 감각이 이성적 지성의 지휘를 받고 있다는 말이다.
언어라는 추상적 개념의 영향으로 사물을 감각한다는 말이다.
사물을 직접적으로 감각하지 않고, 언어적 개념으로 질서있게 분류하여 받아들인다.
이를 보통 지각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신체에 감각된 것을 지성으로 한번더 가공하여 인식하는걸 지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구석기 원시인들에게 감각은 이렇게 오감으로 질서 정연하게 분리되지 않았다.
그들은 몸전체로 사물과 교감했다.
아직 세계를 개념에 따라 분류하고 정리할 지각이 발달하지 못했다.
문명의 영향이 없기 때문에 감각기관(지각)이 아니라 신체전체로 받아들였다.
그게 구석기 인들의 정밀한 사실적 묘사의 비밀을 푸는 열쇠다.

각각의 분리된 감각기관이 아니라, 통으로 된 몸전체로 자연을 느꼈다는거다.
구석기 인들은 벌거벗은 감각, 지성의 영향을 벗어나 사물 자체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맨 감각이 수천년에 걸쳐 문명이 깨달은 사물에 대한 인식을 구석기인들이 단번에 획득하게 했다.
들뢰즈가 말하는 기관없는 신체란 이런 벌거벗은 신체를 가리킨다.
이성, 지성, 언어, 개념, 문명의 영향이 없는 맨몸의 감각을 가리킨다.


기원전 1,5000년 - 10,000년.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벽화.  구석기시대 그림.

2. 현대인이 회복해야할 감각
위의 그림은 알타미라 동굴벽화다.
이걸 처음 발견한건 19세기 스페인의 문명인들이다.
당시에는 이 벽화의 세밀한 극사실성 때문에, 이게 위작이라고 생각했다.
구석기의 미개한 인류가 이런 정도의 사실적 묘사를 하는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반복적으로 구석기의 유물들에서 이런 정밀한 사실적 묘사가 발견되면서 그런 오해를 벗었다.

들뢰즈는 기관없는 신체를 현대인들이 회복해야할 감각으로 본다.
들뢰즈가 왜 이런 엉뚱한 생각에 도달했는지 드디어 이해할 것 같다.
들뢰즈가 최종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근대(현대)문명 전체에 대한 비판이다.

세계 1.2차 대전의 비극, 인간에 대한 대량학살이라는 비극의 시대를 그는 정면으로 겨누고 있다.
그는 근대문명이 인간이 인간을 대량학살하는 폭력으로 오염된 문명이라고 보았다.
자본주의적이건 사회주의적이건 근대문명은 가장 폭력적인 문명이다.
결과로 근대적 이성에 의해서 구축된 문명은 해체해서 극복해야할 대상이라고 보았다.

그 대안적 수단을 그는 원시인들의 맨몸으로 느끼는 감각에서 찾았다.
그게 기관없는 신체의 회복이라는 말일거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한 근대(현대)의 너머는 무엇일까?

3. 순간적으로 스쳐가는 아름다운 별자리
진중권이 생각하는 진리란 문득 밤하늘에 나타나는 별자리다.
그 별자리는 임의적이고 일시적이다.
진리한 별자리처럼 상황에 따라 그리고 시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리고 별자리를 구성하는 주체는 사람이다.
결국 그가 생각한 진리한 순간적이고 임의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 무엇이다.
절대적 진리에서 순간적 진리로 진리의 성격을 바꾸어야 한다고 그는 보는 것 같다.

cf1) 이 글은 진중권의 '미학 오딧세이'에 기대어 썼다.
진중권의 사유 또는 들뢰즈 사유의 한 꼭지점을 넘보는 것 같은 쾌감을 느낀다.
모더니즘을 해체하고 남는것은 무엇일까?가 항상 의문이었는데 그 너머가 어렴풋하게 나마 보인다.
푸코식으로 말해서 자기구성적 인간의 탄생이고, 들뢰즈식으로 말하면 기관없는 신체의 인간이고, 진중권식으로 말하면 밤하늘에 찬란하게 빛나는 잠깐식 스쳐 지나가는 별자리이다.
김영민식으로 말하면 몸으로 이드거니 내파하는 삶일 것이다.
거기에 공약수처럼 놓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유일한 진리는 진리가 없다'는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