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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는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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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시선이다. 근대는 이 시선을 효율적으로 구성하는체제다. 팝옵티콘체제라는 것이 있다. 육각형의 높은 탑을 쌓고 꼭대기에 망루를 설치한다. 망루의 창은 검은색이다. 이 탑을 중심으로 수형자들의 공간을 배치한다. 그러면 망루에 간수가 있건 없건 감시체제가 작동한다. 수형자들이 간수의 시선을 자기 안에 내면화해서 자동적 자율감시시스템이작동한다. 근대적인 모든 공간, 심지어 사회조직도 이런 모형의 자기동형적 복제모델이다. 심리적 차원에서는 이런 망루의 기능을 아버지로 상징되는 초자아가 수행한다. 이런 초자아들의 예를 들자면 국가체제, 도덕체제, 학교체제 등이다. 이런 체제들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는 근대의 합리적 이성이라는 것으로 만들어진다. 우리가 진리라고 받아들이도록 강요 받은 또는 스스로 받아들인 근대적 이성의 진리구성이 허구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근대이성 비판들에서 풍부하게 되어있다. 지금의 문제의식은 근대를 허문 그 자리에 무엇을 어떻게 할것인가에 대한 실험들이다.  
교실에 걸린 아래 그림의 상징성을 생각해 보면 학교가 왜 초자아인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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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구는? 나도 모른다. 알아서 탈출해라! 

1. 권력놀음


권력이 웃긴다!는 말은 좀 우숩다.
권력이 얼마나 무서운데!
남자들에게 권력은 자기존재감의 뿌리이다.
권력의 확인을 통해서 내가 실존한다는 느낌을 갖는다.

남자들은 권력을 자아정체성의 중심으로 간주한다.
돈을 추구할때 조차도, 그것은 권력을 위한 대리욕망의 표현일 뿐이다.

헨리 키신저라는 사람이 있다.
냉전시기 미국 공화당 외교정책의 전형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 외교정책 말고, '성적 섹시함이란 권력이다'라는 키신저의 말을 통해서 나는 그를 더 잘 기억한다.

30여년도 더 지난 20대 어느 순간엔가 이 말이 나에게 들어왔다.
그후로 이 말은 내가 세상을 해석하는 핵심적인 코드의 하나로 사용했다.
세상이라는 망망대해에서 좌표를 읽고, 방향을 결정하는 나침반의 하나로 사용했다.
그런 기능을 했던 많은 코드들이 있었겠지만, 그리고 많은 코드들이 내 안에서 서로 나를 낚아채기 위해서 투쟁했겠지만, 권력이 내 주체성을 낚아챈 많은 순간들이 있었단걸 부정할 수 없다.

2. 권력 가지고 놀기

오늘 책을 읽다가 이런 귀절을 만났다
"권력의 중심은 그 능력의 지대 보다는 그 회피와 무능력의 지대에 의해 훨씬 잘 정의된다"

정수리를 제대로 한대 맞았다.

나는 권력이 세상을 규제하는 일차적인 힘이라고 생각했다.
권력을 놓고 투쟁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누가 갖는냐를 결정하는 일이고,
그렇게 결정된 권력은 당연한 일차적 지배권을 갖는다고 생각했다.

이런 측면에서 저항이란 대체권력에 대한 욕망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권력을 획득함으로서 정당성은 자동적으로 주어지고,
그것이 세상을 지배하는 새로운 힘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권력이 일차적인 것이 아니고 권력을 회피하는, 권력이 작동되지 않는 영역이 일차적인 힘이라는 말이다.
권력은 그런 영역을 추후적으로 따라 다니면서 구성된단다.

그렇다면 일차적 힘은 권력의 작동 방식이 통하지 않는 여분의 영역이다.
권력은 질서있게 권력이 작동하는 영역이 아니라 권력의 작동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흐름들을 쫒아가면서 그걸 포획할려고 하면서 구성된단다.

힘 빠진다.
권력이 겨우 사회적 여분의 영역을 쫒아다니는 따라쟁이에 불과하다는 말이야!

그렇다면 사회라는 것도 새롭게 규정해야 한다.
사회는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스스로 작동하면서 행위를 만들어내고 그런 자신을 만들어 내는 실체다'라는 것이 기존의 전통적인 견해였다.

그러나 '권력이 사회적 잉여를 따라 다니면서 구성된다'는 새로운 생각을 인정한다면, '사회는 권력의 외부에 있는 흘러넘치는 사회적 잉여들이다'라고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단순하게 말해서 구조가 아니라 구조의 바깥이 오히려 권력의 일차적 속성이라는거다.
구조의 바깥을 따라다니면서 사회가 구성되고 권력이 구성된다는 거다.

니체의 말중에 이런 말이 있다.
'권력은 모든곳에 편재한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해석했다.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은 없다.
인간은 권력의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앞으로는 이말을 다르게 해석해야할 것 같다.
'권력은 사회적 잉여들을 따라다니면서만 모든곳에 편재한다'

결국 언제나 어디서나 사회적 잉여가 있다는 것이고, 그걸 통해서 권력이 존재한다는 거다.

권력이 이렇게 웃긴단다.
권력을 웃기니 진짜 권력이 나오는 구나!

왜 이걸 진즉에 몰랐을까?

권력이 진짜 웃긴다.

이렇게 권력을 웃길려는 나도 웃길까?

그렀다면 나는 진짜 권력이다.
결국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내가 진짜로 추구하는 것은 권력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권력에 눈먼 내친구 마초 아저씨들이 진정한 나의 정체성임을 확인했다.

행복하다(심하게 분열하고 있다).

권력의 외부에 있는 여자들이, 권력을 아예 개 무시하면서 사는 여자들이 남자들을 우습게 깔보는 이유를 이제야 좀 알것 같다.
아이고! 쪽! 팔려!

cf) 권력이 이차적이고, 권력의 작동에서 벗어나 있는 사회적 잉여들이 일차적이라면, 권력에 대한 저항이론은 폐기되어야 한다. 오히려 올바른 실천이론은 저항이 아니라 그냥 새로운 실험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행위도 저항개념으로 포착할 수 있겠지만, 저항이라는 개념이 권력의 선차성을 상정하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그냥 편하게 '다르게 또는 새롭게 시도하기' 같은 말이 적절할 것 같다. 그러나 다르게나 또는 새롭다는 말이 기존의 행위방식이라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이 말도 일정한 한계가 있다. 다른 용어로 '욕망을 시도하기"라는 용어도 생각해 봤다. 하지만 욕망이 기존사회의 주류적 행위규범에 따라 구성된 욕망이라는 공격에 부딪히면 이 말도 수동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냥 '그냥 실험하기. 그냥 한번 해보기. 그냥 시도하기'라는 말 밖에 상상해낼 수 있는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