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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무능 : 선의 또는 호의의 무능



왁스 '내게 남은 사랑을 다 줄께'
http://kr.youtube.com/watch?v=1Mh0oJkkk2c

식당개 3년이면 라면을 끓인다.

1년 동안 짬짬이 밴드하는 아이들 따라다녔다.
밴드라는게 워낙에 몸 덩어리가 크다.
이것 저것 허드렛일 챙길게 있다.
그걸로 겨우겨우 체면치레하면서 시간이 갔다.
연주에 관하여 아무런 기능이 없이 무데뽀로 쫒아 다니다 보니 뒷 덜미가 뜨뜻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 사이 귀가 트였나!
기타 연주가 들린다.
드럼 연주는 더 기가막히게 들린다.

세상에 처음부터 세속의 일들을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몰라도 마음이 땡기면 일단 부딪혀 보아야 한다.
그 다음 문제는 또 부딪혀서 해결해야 한다.
마음을 일단 넘어서야 한다.
현실속에서 실천으로 도약하지 않는 마음이란 그냥 진공속의 회오리다.
선의와 호의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기껏 해봐야 자기 나르시즘을 위한 변명만 무성하게 마음속에 가꿀뿐이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밴드 지도교사를 하겠다고 나섰던 내가 대견하다.
최소한 귀가 호사할 줄 아는 감식안이라도 얻지 않았나?
아이들도 나 처럼 뒷바라지 잘해주는 선생을 만날 수 있을까?

근데, 블로그에 코 박고 이러는건 또 다른 나르시즘 아닐까?
현실의 무능을 숨기려는 또 다른 호의나 선의의 나르시즘일까?
타자의 세계로 가는 그 지난한 길에 지레 겁을 먹고 있는 자세는 아닐까?

블로그 밖을 새롭게 구성하고 싶다.
실패하면 어떤가!
거기서 또하면 되지!

오늘은, 넷트워크가 답답하다.

cf) "나비와 전사". 고미숙. 그린비.

경계 + 넘어  : 발트해의 늑대는 사냥꾼들에게 계곡의 미리 설정된 특정 지역으로 몰려 들어간다.
그곳에는 형형색색의 휘장이 드리워 있다.
이 휘장 앞에서 대부분의 늑대는 멈추어 선다.
이 휘장을 일종의 경계로 인식한다.
그때 사냥꾼들은 늑대를 낚아채 목을 딴다.
그런데 어떤 늑대들은 이 휘장을 뛰어 넘어 그냥 내 달린다.
휘장 넘어에는 천개의 고원이 펼쳐져 있다.

발트해 지역의 늑대사냥 방법이란다.
우리가 경계라고 인식하는 것들은 사회적으로 만들어 놓은 일종의 형형색색의 휘장이다.
그것은 제도일수도, 교육일수도, 도덕일수도, 상식일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계 넘어에 대한 공포로 휘장 앞에서 멈추어 선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국가나 민족이라고 호명되는 사회의 포로가 된다.
알뛰세르 식으로 말하면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호명당한다.
그리고 그 호명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휘장을 무시하고 뛰어 넘으면 또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천개의 고원이 눈앞에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