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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경치

오오송 3

 

오오송 3.m4a

 

슬픔의 이면.

 

60여년을 살면서 제일 황당하고 슬펐던 일은 어머니와 친구의 상을 동시에 치려야 했던 순간이다.

그는 내게 조의를 표하러 왔다가, 돌아가던 길에, 불의의 교통 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

그와 나는 서로의 피를 빨아 먹으면서 가난한 청춘을 같이 버텼던, 서로에게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갑자기 땅 밑이 푹 꺼지는 아득함이 밀려온다.

뜬금없이 슬픈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요 며칠간 내 메세지를 열심히 모니터 해준, 존경하는 선배님이, 내 글을 보면서 슬픈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단박에, 그 선배님의 슬프다는 정서의 배경을 낚아 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실에서 또 다시 실패할 거야! 라는 무의식적 예감이 아마도 그 순간 그선배님을 지배했을 것이다.

그 분의 순수하고 깨끗하고 맑은 영혼이, 그를 그렇게 예민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슬픔의 이면은, 성취되지 않은, 실패로 잃은 무언가에 대한 애정의 정서다.

슬픈만큼, 잃은 것을 강렬하게 원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슬픔은 현실의 패배를 다시 딛고 일어서게 만드는 힘을 내재하고 있다.

실컷 슬퍼야, 또 다시 내일을 기약할 수 있고,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성공의 추동력이다.

전봉준의 슬픔, 유관순의 슬픔, 윤상원의 슬픔은 항상 역사를 전진시키는 근본 동력이다.

슬픔을 정리해서 정교하게 다듬은 언어로 그리고 문화적 코드들로 애도하는 것은, 그것이 항상 새로운 출발의 기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미리 슬픔을 예단하지 말고, 할 수 있는 지랄을 다하는 것이, 삶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 아닌가요?라고 대꾸하지 못하고. 애먼 소리만 늘어 놓다가 전화를 끊었다.

고백하자면, 20년도 더 지난 그 시절의 슬픔은, 항상 살아서 되돌아 와, 힘든 역경의 순간 순간들을 버티게 해 주었다.

아마도 그때의 슬픔이 없었다면, 내 인생은 훨씬 빈약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진짜 슬프기 위해서라도 남은 몇일간은 미치게 살고 싶다.

미쳐야(狂) 미친다(到).

미쳐야 미치지 않는가?

 

그런데 항상 언제나 또 그렇지만, 문제는 잘 미쳐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미친척은 되는데, 그 이상이 안된다.

그게 내 한계고,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의 패턴이다.

미칠 수 없음을 어떻게 극복하고, 실제로 미칠 수 있을까?

 

cf) 지는 멀쩡하면서, 남들한테 미치라고 풀무질했던 보들레르를 인용할까? 하다가. 그보다 더한, 현실에서도 실제로 미친, 그래서 기절 상태에 있는, 그러나 여전히 갠찬은 시인, 황병승을 인용하고싶다.

"나는 혼돈의 음악을 연주하는 대담한 공주를 두었나니, 고리타분한 백성들이여, 기절해라! 단 몇초만이라도"

 

이러면, 이제 나도 미쳐 보일까? 아니면 여전히 미친척하는 걸로 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