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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경치

옛날 이야기 2

cf) 이것도 3년전 분회장 시절에 썼던 글이다. 이런식의 옛날을 정리하려는 욕망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 어렴풋한 자각이 생긴다. 진짜로 학교를 때려치운 정리를 하려는 욕망이다. 과거를 정리하면, 새로운 어떤 욕망이 준동할지 모르겠다. 지금으로서는 중국에 대한 공부를 쫌 진지하게 해볼려고 나대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두고 봐야알겠지만...

 

다중(Multitude), 집단지성 그리고 제국

<촛불 정국에서 새로 톺아야 할 개념>

 

다수성을 지칭하는 다양한 이름들

1) 국민

현대사회에서 다수성을 지칭하는 가장 일반적인 용어는 국민이다. ‘국민이라는 용어는 서구유럽이 중세의 제국적 질서를 무너뜨린 자리에 민족 단위의 국가를 세우면서 사용된 용어다. 언어, 민족, 문화, 종교적인 동일성을 근거로 국민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데, 이런 국민국가는 서구가 전세계적 패권을 구축하면서, 비서구 세계의 구체제(청제국, 무굴제국, 오스만제국)를 해체하는 이념으로 사용하였다. 서구에서는 국민국가가 중세의 종교적 통일체제가 무너진 자리에 다양하게 분기한 신교의 종교적 통일국가 체제였던데 비하여, 비서구에서는 서유럽 제국주의가 비서구의 구체제를 허물고 제국주의적 지배질서를 새롭게 확립하기 위한 작위적 정치이념으로 등장하였다.

이런 조작적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서 베네딕트 같은 사람은 국민국가를 허구적인 상상의 공동체라고, 즉 구체적인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조작적 산물이라고 말한다. 비서구의 관점에서는 국민국가라는 개념에 서구제국주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용어일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세기에 세계는 서구패권 중심으로 새롭게 만들어지면서, 불특정 다수를 가리키는 용어로서 국민은 사회-정치적인 맥락에서 가장 일반적인 다수성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2) 시민

국민이라는 용어 다음으로 많이 쓰이는 다수성의 용어는 시민일 것 같다. ‘시민이라는 용어는 국민보다도 민주적 계몽이라는 측면에서 더 많이 깨우친 존재라는 느낌이 강하다. 한국과 같이 제국주의 식민경험을 가진 상황에서는, 시민이란 제국주의의 식민성인 국민이란 정체성을 극복한 새로운 선진적 정치주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국민이 제국주의적 잔여물이 느껴지는 용어라면, 시민이라는 개념은 경제정의’ ‘환경보호’ ‘보편적인권이라는 시민사회 주요 운동영역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국가영역을 초과하는 잉여를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시민이란 국가 보다는 세계에 귀속된 존재처럼 규정된다.

한국사회에서는 1987년의 대통령 직선제로 수렴된 혁명적 힘들을 시민혁명이라고 지칭했고, 그 결과물인 6.29 선언 이후 수많은 시민사회운동단체가 만들어졌다. 대표적으로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경실련’ ‘인권연대등이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시민운동 단체들이다.

당시의 관점에서는 각성된 개별적 시민이 민주화된 사회의 최소 단위이면서 이들의 집단적 의사표현 단위인 각종 시민단체가 민주적 국가를 작동시키는 운영기구라고 보았다. 이러한 시민이라는 개념은 자본주의 사회체제에 대하여 친화적이거나 또는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가치판단을 보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민중

시민이라는 개념의 중산층 지향적이면서 또한 사회적 지배체제에 대한 무비판적 성격과 대비되는 다수성을 지칭하는 개념은 민중이라는 용어다. 민중은 피지배계급 일반의 저항성을 상징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민중이라는 용어는 시민이나 국민이라는 개념 보다 대안적 사회체제에 대한 강력한 지향성을 보다 강력하게 내포하고 있다.

이런 민중이란 개념은 종교와 사회부분에서 강력하게 출현하였는데, 종교 분야에서는 남미의 민중신학이 성경과 함께 총을 든 예수라는 이미지로 대표되고, 한국의 민중 신학도 군부독재 사회체제에 대한 강력한 무장 저항을 지지하는 이론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자본주의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의 다른 한 갈래는 노동운동에서 주로 연구되고 발전시킨 민중이라는 개념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민중이란 자본주의 피지배계급 일반 이라는 비교적 균질한 계급적 성격을 가진 다수성이고, 대안적 사회체제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사회적 혁명지향 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민중이란 개념은 2000년대 이후로 한국사회의 형식적 민주주의가 정착되면서, 사회적 변혁에 대한 에너지를 체제내적으로 수용하면서, 더 이상의 유효성을 상실한 개념으로 치부되고 있다.

 

그렇다면 2008년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에서 잠깐 출현했다가, 최근의 촛불 집회에서 나타난 다수성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국민일까? 시민일까? 민중일까? 어느 개념으로도 잘 포섭되지 않는 전혀 생소하면서도 이질적인 다수성을 설명할 새로운 개념틀이 필요하지 않은가?

 

2. 다중이라는 용어의 출현

다중이라는 용어를 정밀한 사회-정치적 용어로 제시한 사람은 네그리와 하트다. 네그리가 이탈리아 변혁운동의 과정에서 다중이라는 개념을 갈고 닦았다면, 하트가 이를 영어로 번역하면서 보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사회-정치적 어휘로 발전시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국적 자본주의가 세계적 규모로 확대되고, 정보화 사회의 진전에 따라 노동의 성격이 변화하면서 이에 대한 대응으로 새로운 변혁이론의 정립이 필요한 상황에서 네그리-하트의 다중이론이 한국사회에서도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왔다.

2008년의 몇몇의 여고생들에게서 시작된 광우병 관련 촛불집회가 수십만명이 운집하는 대규모 운동으로 갑작스레 폭발한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사회 분석의 틀은 다중이론을 제외하면 사실상 전무하다.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허겁지겁 윤수종(전남대사회학과교수. 네그리-하트의 저서 제국’ ‘다중등을 번역 소개함)이 학문적으로 수입하고 조정환(다중지성의 정원이라는 학습공동체 운영)이 변혁운동으로 차용하기 시작한 다중이론은 2016년의 광화문을 설명하는 분석틀로서 새롭게 톺아 볼 필요가 긴급하다.

 

3. 다중(multitude), 집단지성 그리고 제국

1)다중 : 광화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간략하게 다중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간략하게 살펴 본 바와 같이 국민 시민 민중이라는 다수성은 일정한 특수성을 가진 개별적인 정치적 주체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서 다중은 하나의 동일한 정체로 환원할 수 없는 차이들의 연쇄라고 할 수 있다. ‘많은이라는 의미의 형용사형 multi와 명사형 어미 tude의 결합어인 multitude는 그자체로 하나의 동일성으로 의미규정을 거부하는 다양체라는 의미를 가진다.

개별적인 정치적 주체들 간의 차이가 상위의 코드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거나 질서가 부여 되지 않는 차이들의 무한 연쇄라면, 이런 차이나는 주체들은 특정한 코드로 묶어서 집합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다른 측면에서는 이런 차이들을 긍정적으로 인정하면서, 다양성을 고양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즉 어떤 특정한 하나의 코드로 차이들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의도가 억압을 배후에 깔고 있다는 가치판단을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집단지성 : 그럼에도 다중이라는 개념에 자본주의 발전과정과 그에 따른 노동의 성격변화라는 맥락을 부가하면, 다중 개념에 대한 좀 더 분명하고 통일적인 의미가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네그리는 자본주의가 심화되면서 생산적 노동형태에 발생한 근본적 변화에 주목한다.

과거의 노동은 대상에 대한 인간의 직접적-육체적 개입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세계가 하나의 단일제국인 지식-정보화 사회에서, 생산노동의 주요형태는 네트워크나 지식 또는 정보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생산관계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노동양식에 근본적 변화가 발생했다. 지식을 매개로 네트워크를 통하여 대상에 간접적으로 개입하게 됨으로서 노동자들은 생산관계에 대한 자율적 통제력이 더 높아졌고, 이런 변화는 사회적 지배관계에서도 노동자들의 자율적 통제능력이 향상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노동양식에서 지식이나 정보가 주요 수단이 되면서 노동자 상호간의 자율적 협력과 연결은 더욱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이와 같이 노동관계의 변화는 노동자들의 자율적 협력과 연대를 통한 지식생산을 요구하는데, 이런 조건이 집단지성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다.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상호 연대와 협력에 의한 집단적 지식 생산이 일상적 생활양식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집단지성은 제국시대의 보편적 지식생산양식으로 출현한다.

다시 말해서 다중이라는 특정할 수 없는 다양한 소수자 집단들의 자율적 출현은 정보화된 지식노동과 그것들의 연결망인 네트워크에 의해서 토대가 마련되어 있다. 이런 토대위에서 다중은 생산관계 또는 사회적 통제력에 대한 관계에서 주도적 위치를 점유할 수 있고, 이는 인간해방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기능한다.

 

 

3)제국(Empire) : 네그리의 어휘 중에서 가장 난해하고 불투명한 제국이라는 개념을 몇 개의 문장으로 대략적으로라도 그려 내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이 글의 목적인 광화문 현상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필요한 몇가지 제국에 대한 의미들을 간추린다.

 

다중의 힘은 제국의 심장부에 필연적으로 남게 되는 빈 곳 속에서 물질화한다 : The power of the multitude materializes within the vacuum that remains necessarily at the heart of Empire)” ---네그리-하트 <제국>. 김영민의 동무론에서 재인용.

 

네그리는 제국(Empire)이라는 용어를 자본주의가 전세계적으로 가장 보편적인 지배적 생산관계로 자리 잡은 양상을 가르키는 용어로 사용한다. 18-19세기의 제국주의의 개념이 아니라, 지구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일반적(General) 주권자의 개념으로 제국(Empire)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다수의 제국이 서로 경쟁하면서 식민지 쟁탈에 몰두하던 시대의 보통 명사로서 소문자 empire의 제국이 아니라,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고유명사로서 대문자 Empire라는 어휘로 제국을 호칭한다. 다시 말해서 제국(Empire)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전세계에 대한 지배권력을 행사하는 유일한 존재다.

이런 제국개념에 비추어 보면 개별 국가는 제국을 작동시키는 매개적 존재인데, 제국을 군주라고 상정한다면 개별국가는 군주의 지배를 작동시키는 중간 계급인 귀족정도에 해당한다. 개별국가가 귀족이라고 한다면 군주를 떠받치는 직접적 통치기구는 IMF. G8. UN. WTO. 등과 같은 국제기구다. 네그리의 머릿속에 그려진 제국은 일종의 군주정체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제국의 군주정체제의 중심에 정보화된 지식 노동’ ‘정보화된 지식 노동의 협력 체계’ ‘노동을 작동 시키는 네트워크라는 빈 중심이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되고, 이 빈 중심에서 필연적으로 자율적 인간 해방의 존재인 다중이 물질화 한다는 것이다.

제국의 빈 중심에서 다중이 물질화 한다는 것은, 제국이 통치를 위해서 포섭한 사회의 모든 부분, 특별히 반자본주의적 사회영역 또는 민주적인 작동원리를 가진 사회부분까지도 제국이 포섭하기 때문에, 제국의 내부에 이런 민주적 역량 또는 반자본주의적 인간해방의 역량들이 활성화 될 여지가 존재한다는 논리다.

덧 붙여서 네그리가 상상하는 제국의 중심은 물질적 장소성은 아니다. 그러나 구태어 물질적 장소성의 관점에서 사유하자면, 뉴욕 런던 도쿄 서울 북경 심지어 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도 남미의 리오도 제국의 중심이다. 그러므로 광화문도 제국의 중심이다.

 

4. 광화문의 유비(Analogy)로서 다중

1) 모던한 민주적 국민국가를 요구하는 포스트모던한 다중

광화문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구호는 이게 나랴 냐?’이다. 헌법 제1조 내용처럼 국민주권이 실현되는 정상적인 국민국가에 대한 요구이다. 초기에 광화문을 점령한 주류의 목소리는 올바른 민주적 국민국가를 만들어 보자는 욕망의 분출이다.

그러나 그 형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전의 대규모 집회들에서 보이는 양상과는 다른 차이들이 즐비하다. 기존의 민주노총이나 전농과 같은 대규모 사업장들에서 조직적으로 동원된 동일한 정체성의 사람들이 아니다.

일별하자면, 여성단체 또는 여성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고, 각종 소수자 단체와 아무런 집단적 메시지를 발신하지 않는 개인 심지어는 데이트커플 가족모임 동호회모임 등 셀 수 없는 다양한 형식의 사람들로 북적인다.

형식은 다중이고, 내용은 복고적인 민주적 국민국가에 대한 요구이다. 형식과 내용이 서로 어긋나 있는 모습이다. 압축성장으로 인한 여러 사회적 지체들이 광화문광장에서도 반복되는 모습이다.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가 일으키는 양상들은 한국적인 특이성의 패턴인데, 지금 당장은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우는 다중성이 무한정한 에너지를 공급한다. 그러므로 이런 다중성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광화문 광장의 에너지가 그 형식에 맞게 민주적 국민국가에 대한 요구를 넘어서 다양한 다중들의 소수성의 정치영역을 열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2) 다중들이 물질화 하는 장소로서 광화문의 가능성

민주적 국민국가의 건설 또는 회복이라는 의제에 묶이면, 이런 다중들의 에너지가 급격하게 소진될 수 있다. 그러므로 민주적 국민국가와 다중성이 흘러넘치는 사회를 동시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민주적 국민국가가 다중성의 사회를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설정하면, 민주적 국민국가 자체도 형해화 되면서 그마저도 실패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몇가지 예를 들자면, 광화문 광장에서 조차도 국민이라는 호칭으로 포섭되지 않는 외국인들은 예외적 구경꾼 정도로 밀려나 있고, 노동운동의 한쪽에서는 기존의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중앙 집중 지도노선에 차이를 설정하려는 자율적 조직운동 흐름들을 분파적이라고 억압하고, 문화 영역에서는 권위적 기성 문화를 비판하면서 나타난 비주류들의 히피적 실험문화들을 저속한 삼류문화라고 경원하고, 성소수자들의 공적 자기표현들에 대해서는 현실사회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면서 경계하는 흐름들이 있다.

이런 소수성을 부정하는 국민국가 중심적 사고방식으로 광화문을 한계 지으려는 비판들의 가장 대표적인 논리는, --동으로 대표되는 기득권세력이 말하는 이제 탄핵안이 통과 되었으니 촛불을 끄고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들은 개헌으로 권력의 일정 부분을 제도권 야당에 양보하면서 기득권의 재창출을 시도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최장집 등과 같은 정치학자들을 중심으로 기성정당을 중심으로 안정적 국정운영을 확립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들은 제도의 정비와 정상적 작동이라는 형식논리 너머를 절대로 상상하지 못한다. 2008년 촛불정국에 대한 최장집의 비판을 상기해 보라. 그러므로 이런 논리에 포섭되는 순간 이번 광화문의 다중성은 애써 죽 써서 개 주는 꼴로 전락할 것이다. 이제는 광화문이 제국의 빈곳으로, 그래서 그곳에서 다중이 물질화하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광화문의 촛불이 국수주의로 퇴행하는 세계를 거꾸로 돌려 세워야 한다. 프랑스 혁명과 같은 새로운 사회적 평등과 박애와 자유의 전범을 만들어 내야 한다.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을 다양한 구호와 요구가 뒤 섞인 그리고 그런 다양성이 혼란이나 폭력이 아니라 평화로운 조화를 이룬 현장은 인류역사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어떤 언어로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특이점인 광화문이 다중으로 흘러 넘치게 하기 위해서는 국민-시민-민중을 뛰어 넘는 자유로운 상상을 적극 지지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은 더 이상 페미니즘이 아니다> <데모당> <삼향동 감자탕 연구회> <민주묘총> <주말에 공좀 차자 빨리 내려와라> <82 > <장수풍뎅이 연구회> <-> <고산병 연구회> <뭘 연구해?> 등등과 같은 무의미한 언어들이 차고 넘쳐서, 단단하고 틀에 짜인 현실을 해체하도록 해야 한다. 그 해체된 텅 빈 공간에서 집단지성으로 무장한 다중들이 물질화 할 것이다.

 

cf1) 2008년도 시청 앞 광장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촛불이 아무런 성과도 없이 시나브로 사그라지는 과정을 한 달 가까이 매주 주말마다 현장에서 지켜보았습니다. 2016년도의 촛불은 벌써 박근혜 탄핵이라는 성과를 이끌어 냈습니다. 그럼에도, 이제야 무언가 시작됐다는 느낌이 더욱 강합니다. 광화문의 촛불은 아직 그 사명을 다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박근혜 달랑 한명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냈다고, 세상은 눈꼼 만큼도 바뀌지 않습니다. 한반도(동북아)평화체제, 시급일만원(경제민주화), 시험준비가 아니라 삶에 대한 배움이 있는 교육, 역사 바로 세우기, 선거제도 개혁을 통한 대의시스템 정비, 노동 기본권 정비, 등등 그 어느 것도 한 발짝도 현실에서 성취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 광화문 광장은 그런 과제들을 해결할 개연성을 눈앞에 펼쳐 보입니다. 평생을 살면서 이건 혁명이라는 이런 본능적 예감은 처음입니다. 제가 쫌 정상이 아닌가요? 이 글은 그 결과입니다. 광화문에서 만나장께요? 16년 광화문이 08년 시청 앞의 데쟈뷰가 되지 않도록.

 

cf2)여기에 언급된 다중의 하나를 장석준은 소득-자산-교육에서 주류를 장악하고 있는 유난히 큰 스피커를 가진 집단으로 보았다. 이들의 주류로서 살아남으려는 치열한 욕망이 요즈음의 부동산 폭등의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이들 중산층을 물리적으로 때려 잡아야 할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장석준은 비정규직과 같은 투명인간들에게 가시적인 정치적 육체를 만들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은, 선거제도 개혁이고, 그럴때 비로소 이들 투명인간들이, 구체적인 사실로서 살아 있는 육체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이들에게도 모두에게 시끄럽게 떠들수 있는 대빤 큰 정치적 스피커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근데, 너무 한가한 처방같다. 성질 같아서는 서울 아파트 가지고 장나치는 놈들 전부 생매장시키면, 션하고 쿨하게 문제가 해결될 것 같다. 너무 폭력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