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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대기

영어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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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지 20여년이 되어간다.
처음 교직에 들어와서 영어선생이라는 정체성에 큰 혼란을 겪었다.
그 시절에는 미제국주의라는게 한국사회 모순의 제일요인이라는 생각이 팽배했었다.
그러니 미제국주의 최일선에 서서 미제국주의를 선전하는 선전요원 아닌가라는 생각에 시달렸다.

이런 정체성 혼란을 해결한건 영어가 단순히 정보를 교환하는 수단이라는 생각을 정립하고 부터다.
영어가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영어는 좋을 수도 나쁠수도 있는, 그저 중립적인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도 뭔가 정체성에 대한 찜찜함은 남았다.

그러다가 몇년전에 어떤 영문과 대학교수로 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미국으로 영문학공부를 하러 갔었어요.
미국에 온지 6년이 지났는데도 영어가 되질 않아요.
그래서 공부를 포기할려고 했지요.
그랬더니 갑자기 말문이 술술 트이는 거예요.

그때 깨달었어요.
내가 영어에 억압당하고 있었구나.
영어를 포기하자 더이상 모범적 영어표현를 사용해야 한다는 심리적 억압이 사라지고, 그러자 영어를 내 마음대로 부리게 된거지요.'

이 말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구나, 나는 한국인 영어선생이다.
그러므로 한국인 영어를 사용해야 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이런 경험을 몇년전 플로리다 주립대학에 연수차 잠깐 있으면서도 경험했다.
플로리다는 멕시코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미국 최남단지역이라 중미나 남미계 주민이 많이 있다.
이 지역들은 스페인어 사용권이라 많은 주민들이 거의 스페인어화된 영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이게 도대체 영어인지 스페인어인지 모를 이상한 영어와 무시로 대면하는 경험이 일상적이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은 그런 영어를 아무 불편없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 영어로 로맨스도 만들고, 물건도 주고 받고, 남을 돕기도하고, 교회에서 예배도하고 그랬다.

이런 경험은 아프리카에서도, 인도에서도, 홍콩에서도, 일본에서도 똑 같았다.
영국영어와 미국영어의 차이는 '문어체나 구어체 모두에서'에서 마치 서로 다른 언어처럼 느켜진다. 
영어를 'Englsih'라고 단수로 표현하는게 잘못이라는 의견이 있다.
영어는 많은 지역에서 서로 다른 형태로 쓰인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복수의 'englishes'가 있다고 말해야 한단다.

단수로서 'English'를 가정하면 이 세상에 표준적인 영어가 있고, 미리 주어져 존재하고 있는 그 영어를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억압이 발생한다. 
결과로 영어를 사용하고 있는 인간이 주인이 아니라, 영어가 인간을 부리는 주인이 된다.

영어에 대한 이런 잘못된 생각은 기본적으로 영어에 대한 사대주의적 태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영어를 사대주의적으로 대하다 보니,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 혀 수술을 하는 희극이 발생하고, 영어를 잘하는 것이 성공이나 휼륭한 사람의 지표로 생각하게 된다. 
아무런 직무 연관성도 없이 사람을 채용할때 영어시험성적을 요구하고, 그걸 조금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는 일상이 발생한다.
이렇게 되면 영어는 계급적 지표를 가르는 메카니즘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런 풍토에서 이익을 취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어렸을적에 미국으로 유학가서, 표준적(?)인 미국영어를 구사하는 경제적 부를 가진 대한민국 1% 강남세력이다.
이들은 차별화된 영어를 사용함으로서, 자신의 지배적 지위를 정당화한다.
표준적인 모범적 미국영어라는 전제를 받아들이면, 영어가 사람을 구분짓는 기제로서 작동하기 시작하고, 그게 아무런 저항없이 사회전체에 관철되는 이데올로기가 된다.

영어에 대한 이런 태도는 영어를 자신의 삶을 풍성하게하는 도구적 수단으로서 활용하는데 방해만 된다.
사실이 아니지만 백번 양보해서 국민들의 영어능력 제고가 국가경쟁력 제고에 도움이 된다고 할 때도, 이런식의 영어에 대한 사대주의적 태도는 영어능력 향상을 저해하는 요인이다.
영어교육에 그 많은 사교육비나 공교육비를 투자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Toefl 성적은 항상 전세계에서 꼴찌 근처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박노자 교수의 '스웨덴의 자전거포 주인의 영어사용능력이 한국의 평균적인 외교관 보다 휼륭하다'라는 비아냥을 그냥 넘기기에는 영어에 대한 쓸데없는 낭비가 너무 심하다.
스웨던의 언어조건이 한국어보다 영어를 사용하기에 가까운 영어친화적 언어라고 할지라도, 스웨덴의 평범한 일상인의 영어가 한국의 외교관보다 휼륭하다는 것은 우리의 영어사용 태도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걸 의미한다.

영어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적 수단이다.
그러므로 미국이라는 코드로 표준화된 영어가 아니라, 우리의 영어를 사용해야한다.
미국적이라는 코드로 표준화된 영어를 계급적 지위를 가르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한 영어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하는,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몸쓸것으로 되고만다.

나는 'Konglish'를 적극 지지한다.
한국인의 영어에는 당연히 한국의 문화적 요소들이 풍성하게 들어 있어야 한다 .
그게 영어를 풍부한 언어로 만드는데도 도움이 된다.
기본적으로 사람이 영어의 주인이지, 영어가 사람을 부리는 영어의 노예가 되어서야 말이 되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대학입시에서 영어과목이 폐지되어야 하고, 각종 채용시험에서도 직무관련성과 상관 없이 영어가 무차별적으로 사용되는 현실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면 학교교육에서도 그리고 일반인들의 영어사용에서도 자연스럽게 영어가 위압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저 의사소통을 위한 가벼운 가치중립적 도구로 다루어질 수 있다.

그럴때에만 현재의 광기와도 같은 망국적 영어 열병에서 벗어날 수 있고, 영어가 우리 모두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단지 하나의 겸손한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거꾸로 간다.
이병박 당선자의 영어교육 입안자(한때는 소위 진보적 학문을하는 사람이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국내 유수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가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부터 영어로 수업하는 과목의 수를 점차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걸 신문에서 읽었다.
이렇게 하면 결국 영어교과가 아닌 다른 과목도 영어로 평가를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아예 영어가 전국민을 전일적으로 지배하게 하자는, 영어의 노예로 기필코 만들고야 말겠다는 주장이다.

영어는 단지 의사소통의 수단이다.
한국의 주요 의사소통 수단은 당연히 한국어다.
영어를 그냥 영어로 해방시켜 주는게 영어에도 올바른 대접이고, 모두가 영어를 보다 편안하게 배우고 사용할 수 있는 길이다.

아이들을 영어에 목매게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영어와 놀게 하자.
심지어 'broken englsih'도 'konglish'도 모두 다 영어로 편하게 사용하게 하자.
미국사람들 조차도 미국 표준영어라는 강박에 시달리지 않는다.

어떤 미국인은 'hand phone(콩글리쉬)'이 'mobile(영국영어)'이나 'cell phone(미국영어)' 보다 훨씬 의미가 풍성하고, 지시대상을 잘 가리킨다고 말한다.

언어란 원래 그런거다.
살아서 펄펄 뛰고, 살아서 휙휙 날아다니는 것이 언어다.
편하게 영어를 사용하게 하자.

지금처럼 어떤 특정한 영어를 표준화 시켜 놓고 모시는 분위기에서는 영어의 노예가 되기 십상이다.
영어교육에 대한 좀더 순수한 접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