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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메리칸 버티고



아메리칸 버티고

미국에 대한 이해를 이 책만큼 풍부하게 보여주는 책은 없을 것 같다.
저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프랑스철학자이면서 소설가이고 저널리스트다.
그는 어느날 잡지사로부터 미국여행을 제안 받는다.
여행은 200여년전 미국여행기를 썼던 유명한 철학자 토크빌이 갔던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200여년이 지난 다음 토크빌의 재현으로서 여행을 제안 받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불가피하게 토크빌을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
토크빌을 레비가 재현하면서 여행기를 쓴것이니 토크빌과 레비의 이중 여행기라고 해야한다.
토크빌이 본 미국을 레비가 토크빌의 렌즈를 통해서 보면서 레비의 해석틀이라는 프리즘에 다시 비추니 내용 자체가 현란한 색깔들로 빛난다.
책이 시각적으로 현란하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제목 아메리카 버티고는 우리말로 해석하면 '현기증 나는 미국'정도 된다.
책장을 넘기면 바로 그런 현기증을 첫페이지 부터 맛볼 수 있다.
그 중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몇가지 현기증을 정리해두고 싶다.


1. 수형제도(깜방시스템)를 중심으로 미국 들여다 보기

수형제도를 통해서 그 사회를 들여다 보는 방식은 푸코를 통해서 처음 접했었다.
'감시와 처벌' '광기의 역사' 같은 그의 저작들은 광인, 범죄자, 부랑인 등을 처리하는 형행방식이 그 사회의 작동시스템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제공해 준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저자에 따르면 173년 전에 이미 토크빌이 미국을 여행하면서 그런 작업을 수행했단다.
저자도 토크빌의 길을 따라서 미국의 감옥들을 방문한다.
저자 레비가  감옥시스템을 통해서 해석한 미국 사회는 철저한 분리와 배제의 사회라는 것이다.

유럽의 감옥들이 감시-처벌-재활에 대한 갈등과 고민들 속에서 운영되는 시스템이라면, 미국의 감옥은 물샐틈 없는 분리와 철저한 배척에만 관심을 갖는 다는 것을 엘카트레즈 형무소를 통해서 보여준다.
미국의 이런 형행시스템은 미국사회의 작동 방식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
백인 주류사회와 사회적 약자인 흑인이나 빈민 소수민족들 사이의 철저한 분리, 다양한 사회집단들의 단절과 분리를 레비는 미국 라이커스 아일랜드와 같은 교도소를 통해서도 다시 확인한다.

최종적으로 관타나모 형무소를 통해서 레비는 미국에 대한 절망을 표현하고 있다.
관타나모의 현실을 뉴올리언스의 비극은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세계 제일의 부자나라인 미국이 위기관리 시스템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제삼세계처럼 홍수에 잠기고, 침수된 도시에 개처럼 둥둥 떠다니는 흑인 시체들, 이웃의 비극에서 재빨리 빠져 나올 물적 기반을 갖춘 백인들이 만들어 내는 엉망으로 흐트러진 도로 정체, 구조를 위해서 들어간 경찰이나 주방위군이 재난자들과 군사적인 대치상황이 연출되는 모습은 미국사회의 미개성의 총체적 표현이고, 그것은 관타나모의 다른 재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비는 미국이 아직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뉴올리언즈를 통해서 드러난 미국의 치부를 미국이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새로운 가능성이, 그리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 처럼 미국이 나머지 세계에 새로운 모범적 전형을 창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미국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경이롭고도 미친나라, 최고의 것과 최악의 것이 함께 만들어지는 실험실, 오만하면서도 겸손한, 물질주의에 취해 있음과 동시에 과격한 청교도적 종교성에 최해 있는, 미래를 지향하면서도 또한 지난 일들에 강박관념으로 사로잡혀 있는 이 나라(p.362)'라고 말하고 있다.


2. 부시에 대한 생각

부시는 왜 이라크와 전쟁을 벌였는가?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한것 : 사담은 아버지를 모욕했다. 나는 사담에게 그 모욕을 돌려 줄 것이다.
아버지에게 오이디프적 도전장을 날리기 위한 것 : 아버지가 하지못한 것을 나는 한다.
이는 그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또 다른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아버지를 전재해야하고 그에게 충실하게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진실은 어떤 경우든 부시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레비가 미국의 지성인들 부터 전해들은 부시에 대한 해석이다.
언젠가 북한의 핵실험이 뜨거운 현안인 즈음에 '제발 착한 우리 부시를 괴롭히지 말라'고 지나가는 한국인을 붙잡고 호통을 치는 백인 할머니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 말이 레비의 부시에 대한 생각을 읽으면서 상기되었다.
어린아이 처럼 순박하고 착한 부시라는 이미지가 미국 백인 주류사회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의 생각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러면서 레비는 이 어린아기가 매섭고, 단오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어린아이의 소심함에서 오며 그 소심함은 또한 두려움에 기인한단다.
그래서 레비는부시를 모욕당한 어린아이라고 생각한다.

모욕당한 어린아이로서 부시의 성장과정에 대한 레비의 설명은 이렇다.
'고향 텍사스에서 문제아로 자란 소년. 성적은 중간정도 였고, 자주 소란을 피워 부모에게 걱정을 안겨주었던 그. 배경은 좋으나 좀 촌스럽고 속물적이라고 미국동부의 귀족집안 자제들에게 취급 받던 대학시절. 촌스런 나르시스트에 어설픈 딜레탕트, 서툰 사업가로 뒤늦게 까지 아버지에 의존한 아들의 모습. 불을 뿜는 자동차 운전과 친구들과의 술 파티만 일삼던 낙오자. 오랫동안 너무나 범상한 모습에서 벗어날 희망의 싹도 찾아볼 수 없던 인간.'

그런데 미국사회는 이런 그를 지구상에서 가장 어려운 경쟁에서 두번이나 승리하도록 허용했다.
그렇다면 미국 사회 자체가 유아적이라고 해석할 수 밖에 없다.
유아적인 순수함이나 순박함이 부시라는 인물을 통해서 표출된 것이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미국사회의 단면을 부시는 잘 보여준다.

이렇게 미국을 해석하면 두가지 생각이 동시에 교차한다.
하나는 미성숙한 미국이 지구상의 최강국이라는 데서 오는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의 순수함이나 순박함에 기대어서 무언가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개연성에 대한 기대이다.
나는 전자의 미국이 두렵다.
그래서 어떻게든 미국을 통제하고 견인할 그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레비는 그게 지금보다 더욱 강력하고 성숙한 통합된 유럽일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유럽이 어린아이 미국의 성숙한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3. 미국대선에 대한 생각

나는 미국 대선이 외부인에게는 또 하나의 유아적 지표를 가리키는 기호라고 생각한다.
레비가 바라본 미국대선은 합리성을 상실하였다.
부시와 캐리의 전국적으로 방송되는 토론은 선거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2004년 미국대선).
미국의 대외정책이나 연방 전체에 영양을 미치는 국내 정책에 따라 투표가 이루어지는게 아니란다.
투표행위를 결정하는 것은 작은 지역문제에 대한 차이들이나 사소한 이념적 정책적 차이들에 따라  결정 된단다.

세계적인 규모의 선거가 하나의 지방 선거처럼 작동하고, 전 세계의 국민들이 일제히 시선을 고정시키고 지켜보는 거대한 선거, 유럽인-중국인-팔레스타인인-이스라엘인-이라크인 할 것 없이, 그 결과에 지구의 운명이 걸린 그런 선거가 낙태에 찬성하느냐, 아니냐와 같은 종교적 태도와 관련된 사소할수도 있는 이슈들에 지배된다는 것은 분명히 불합리하다.
이런 불합리성은 어디로 부터 오는가?

미국이라는 나라가 외부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 기인하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사소한 문제들에 집착하는 의사결정 방식이 다수의 독재를 방지하는 진정한 민주주의(민주주의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의 실현이라는 과잉 자신감의 표현일 수 있다.
어느 쪽이건 미국인들의 투표 행태는 외부자의 시각으로는 대단히 불합리하다.
미국의 외부는 미국에 대해서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고 가져야 하며, 미국의 행위는 외부자 자신에게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상황에서, 미국 자신은 그런 외부자를 배제한채 자신의 문제에 편집하는 모양은 서로의 시선이 비켜가는 갈망과 무관심의 교차이다.

이런 소통의 차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어떻게 모색되어야 하는가?
미국의 행위에 따라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미국에 인질로 잡혀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미국 외부 세계는 어떻게 미국과 효과적으로 의사소통 할 수 있는가?
자신의  외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 세계에서 최고로 힘이 센 이 어린아이와 타자는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

아득한 질문이다!.

cf) 자발적 미국 식민지 행세를 하는 한국사회에서 미국에 대한 이해는 어떤 형식으로 든 필요하다. 수 많은 미국에 대한 의견이 있고, 미국에 대한 수 많은 인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것들 대 부분이 둘 중 하나다. 미국에 대한 경외감에 가득찬 찬사이거나, 피해의식에 사로 잡힌 미국을 천하에 몸쓸 악의 제국으로 그리는 거다. 레비의 생각은 미국에 대한 그런 찬사나 피해의식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고, 그런점에서 꼭 필요한 견해로 보인다. 찬사를 하는 사고나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어떤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결국 그 대상을 중심으로 사고한다는 동일한 사고라는 것에서 별 차이가 없다. 그래서 오히려 레비식의 미국에 대한 인식이 제국을 해체하는 훨씬 생산적인 행위를 산출하는 또 다른 실천이론을 낳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레비의 미국에 대한 생각의 절정은 미제국주의를 어떻게 볼것인가에 있다. 그 부분을 제일 관심있게 읽었고 흥미로웠다. 결국 미제국주의에 대한 성격규정을 통해서 미국과의 관계설정 방식을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제국주의에 대한 생각을 따로 떼어서 다음 글로 정리해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