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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대기

삼성


'삼성전자 부사장이 자살로 삶을 마쳤다.
서울대와 스탠퍼드대학을 나온 삼성의 전형적인 특급인재였다.'
어제 부터 포털에 떠다니는 기사다.

한국사람들에게 삼성은 일종의 규범체계다.
삼성 스타일은 사람들이 가장 따르고 싶은 일종의 이상적 준거다.
삼성은 한마디로 한국 사회 일상을 무의식 수준에서 통제하는 매커니즘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해외에서 무시로 마주치는 삼성로고는 한국인들의 자부심이다.
누구나 삼성의 엄청난 성과를 인정한다.
삼성의 그런 성과는 곧바로 관리와 엘리트주의라는 가치의 성공으로 전환된다.

문제는 이렇게 막강한 삼성이 가진 스타일이 반사회적이라는 사실이다.
관리의 삼성과 일등 엘리트주의는 자율과 민주적 연대라는 가치와 대립한다.
삼성의 성공이 지속되는 한 관리와 엘리트주의라는 반민주적 가치는 더욱 견고해진다.

그렇다고 삼성이 망해야한다는 말은 아니다.
삼성이 좀더 사회친화적인 가치를 표상하는 방향으로 변해야한다.

김용철변호사 사건이나 노회찬의원 파일의 폭로에 따르면 삼성은 성공을 위해서 불법과 탈법을 가리지 않는다.
더구나 삼성의 무노조 경영은 봉건적인 냄새마저 풍긴다.
이런 삼성의 행태들이 바로잡히지 않은채로 견고하게 지속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삼성의 엄청난 성공은 장기적으로 한국사회의 바람직한 발전을 위해서 해롭다.
삼성이 지금 당장은 한국사회의 부를 축적시키는데 기여한다고 생각할 수 도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그런 성공이 한국사회의 민주적 연대와 자율이라는 가치를 잠식한다.

기업의 잘못된 성공은 결국 사회에도 해롭다.
제국주의적 전쟁을 등에 입고 승승장구하던 기업들의 당대적 성공은 결국 세계사적 비극의 주연이었다
2차대전 종전후 미쓰비시의 몰락은 그런 전형의 한예에 불과하다.

늘 일등이었으면서도 자살로 삶을 마친 삼성 부사장의 비극이 뭔가 예시적인 징후로 읽힌다.
일등조차 행복할 수 없는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의 죽음이 작게는 삼성 나아가 한국사회 변화의 계기가 된다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율적 관리가 아니라 자율적 협력에 기반한 생산성이 확인될 필요가 있다.
일등 엘리트의 독주가 아니라 민주적 연대가 더욱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다는 모델을 만들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