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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대기

사랑과 충조평판(충고하고-조언하고-평가하고-판단하고) 금지라는 학생지도론에 대한 비판적 논의

2021-04-06 세미나 자료

 

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인가? (헤겔 vs 바디우) --- 하나가 아니라 차이나는 타자로서 둘이라는 관계를, 우연한 타자와 어떤 우발적인 관계를 끈덕지게 버텨내는 충실성.

 

. 사랑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

 

1. 사르트르

사랑에 빠진 자는 다른 일체의 외적인 압력 없이 자유롭게 자신을 사랑하기를 바란다(강신주의 사르트르 서술 재인용)’. 이런 논리는 인간이 각종 사회적 환경 속에서 존재한다는 기본 전제를 망각하기 때문에 허구이다. 개별적 인간들은 그가 속한 역사적-사회적 구성물이다. 따라서 아무런 외적 압력 없이라는 전제는 오류이기 때문에 전체진술이 오류이다. 사르트르의 이런 서술은 자유롭고 평등한 주체적 선택에 기반한 소통 또는 사랑이라는 문제의 지난함을 지적하는 그의 타자론을 대입해 보면, 일종의 과잉과 허장성세의 성격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사르트르가 다른 일체의 외적인 압력 없이라고 말할 때, 사르트르의 타자는 나에게 완전히 복속된 존재를 의미한다. 자아의 타자에 대한 강렬한 지배-정복 욕망은 타자를 애무할 때 나는 나의 에무에 의해서 내 손가락 밑에서 타자의 육체를 탄생시킨다. 애무란 타자를 육화하는 의식(儀式)의 총체이다 라는 애무에 대한 서술에서도 반복된다. 사르트르의 사랑이라는 관계의 대칭적 소통에 대한 이런 비관적 전망은, 어찌 보면 세속적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반영일 것이다. 사르트르가타인, 그것은 지옥이라고 말할 때, 타인은 결국 타자의 시선이고, 이런 타자의 시선은 자아 정체성에 대한 폭력적 개입을 의미한다. 타자를 강제와 구속의 근거로 보는 사르트르에게 결국 자유로운 소통과 완전한 독립적 주체들의 평등한 관계에 기초한 사랑이란, 아마도 불가능한 꿈과 같은 비실재적인 것에 대한 상상이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실험적 계약결혼은 불가능에 좌절하지 않은,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결국 사르트르는 일체의 외적인 압력으로 부터 자유로운 절대적 사랑의 불가능성을 누구보다 깊이 통찰하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2. 라깡

욕망과 그 대상 사이의 불일치때문에, 그럼에도 그 욕망의 대상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고 상상할 때 사랑은 발생한다. 쾌락원리와 현실원리의 차이에서 사랑(욕망)은 발생한다. 라깡의 설명은 단순하게 설명하면 결핍이 사랑을 발생시키고 지속시키는 동인이라고 본다. 이런 설명은 낭만적 사랑의 결혼으로의 귀결이 결국 사랑의 파국이라는 평범한 일상의 많은 딜레마들을 설명하는데 적절하다(금지된 모든 것은 달콤하다. 그러나 그 금지가 해제되거나 충족되면 더 이상의 욕망은 소멸한다).

결국 사랑은 중심이 텅 빈 공간이라는 말과 다름없다. 텅 비어있기에 채우고 싶은 욕망으로 사랑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식은 김영민 식으로 말하자면, 시간을 두고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생산적으로 채워감으로서 가능하다. 사랑을 순간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일상의 규제적인 형식으로 만들어 지며리 만들어 가야 한다는 설명이다.

 

3. 헤겔

혼자의 불완전함 --> 타자 안에서 자신의 발견과 자신 안에서 타자의 발견 --> 사랑의 객관적 실재로서 자식. (강신주의 재서술)’

--자식의 관계를 누군가의 절대적 강자(가부장)인 동일성으로 통일해 버린다. 타자성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 없다. 타자들의 자유에 대한 부정 또는 소멸이 최종적인 귀결지점이다.

헤겔이 타자를 동일성의 제단에 희생시키는 논리적 귀결에 이르는 사유방식은 헤겔의 변증법에 기초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의 변증법이란, 최종적으로 -의 차이를 제거하여 결국 -->으로 다시 환원시키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4. 바디우

사랑은 둘이 있다는 후사건적인 조건 아래 이루어지는, 세계의 경험 또는 상황의 경험이다’. 지금까지 유지했던 세계관계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관계’ ‘-결합의 조건 아래서 둘만의 새로운 경험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사랑이다. ‘-관계’ ‘-결합은 사랑하는 둘이 전면으로 등장하는 새로운 관계의 시작점이다. 이런 방식은 완성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기성의 가치나 권위에 대한 저항이나 이탈이라는 그래서 새로운 관계의 창조라는 혁명성을 내재하고 있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결혼 없는 서로의 혼외관계를 포함한 모든 자유를 인정했던, 평생을 걸쳐 실험했던 관계 방식이 그런 예의 하나로 해석할 수 있다. 사르트르 사후에 보부아르의 회고에 따르면, 그런 지난한 관계 방식을 지탱할 수 있었던 매체는 사르트르의 이었다고 한다. 사르트르의 -언어가 둘의 관계를 여러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지탱해 주었던 접착제 였던 것이다. 사르트르의 타자성(자유) 보부아르의 타자성(자유)이 둘 중의 더욱 강한 누군가의 동일성으로 통일되지 않고 지탱되었던 것은, 이런 관계에서는 서로의 타자성을 새로운 글(언어)을 만들어 내는 생산성에서 찾을 수 있다.

 

5. 기든스(짐멜)

기든스는 짐멜이 지적한 바와 같이 도시라는 새로운 삶의 양식이 사랑의 양태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고 본다. 봉건적인 농촌사회에서 남-녀의 관계 양식은 노동에 압도되어 있었고, 계급이나 가문간의 경제-권력적 연합이라는 하위 매개체로 작동했고, 작은 공동체 내에서 마주침의 기회도 또한 극히 제한적이었다.

이런 사회환경이 도시화와 근대화가 주류적인 삶의 양식으로 자리 잡으면서, ‘생애주기의연장 노동강도의약화 무차별적인만남이라는 사회환경의 변화가 발생하였다. 근대사회는 도시화로 인하여 친밀성이라는 사랑의 구조 자체가 변하였다고 본다. 이런 조건하에서 건강한 에로티즘은 서로의 정체성의 차이를 인정하는데서 가능하다. 중세의이상적사랑이나 고전시대의열정적사랑 근대의낭만적사랑의 에로티즘처럼, 일심동체의 에로티즘은 불가능하고, 각기 다른 주체들의 다른 삶을 긍정하면서, 합의가능한 영역만을 공유하는 합류合流적사랑(confluent love)을 대안으로 내세운다.

 

6. 루만

매체와 코드로서의 사랑’(낭만적인 사랑) : 기능주의 사회학의 대가답게 루만은 사랑을 근대적 사회분화의 관점에서 다룬다. 근대사회가 기능영역에 따라, 대표적으로 사법-행정-입법 등으로 사회가 분화하여 변한 것처럼, 사랑도 독자적인 기능영역으로 분화-발전하였다고 해석한다. 중세의 이상적사랑이나 르네상스기의 열정적사랑은 타자(여성)의 거부(NO)의 가능성이 없는 매체환경에서 기능한다. 그에 비해 근대에는 매체환경의 변화(인쇄매체의 폭발적 증가)로 인하여 거부(NO)의 가능성이 대칭적으로 주어진다. 이런 대칭적 관계에서 사랑은 자신만의 독자적 논리체계를 발전시킨다(자기준거적사랑. 자기생산적사랑. 사랑을사랑함. autopoiesis). 그런 요구가 사랑에 대한 일정한 문화양식 또는 의사소통양식을 발생시킨다. 전통사회에서 계급이나 신분 또는 경제적예속 등으로 환원 가능했던(다시 말해서 독자적인 범주가 아니었던) 사랑이 사회분화와 함께 고유한 새로운 사회영역의 한부분으로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루만의 관점은 미분화된 전통사회에서 사랑이나 애로티즘은 더 큰 사회적 힘들인 계급이나 생존조건에 귀속된 하위 범주였으나, 근대사회에 와서 나름의 독자적인 의사소통의 형식이나 의미해석의 코드를 가지는 매체가 되었다. 루만은 이런 자기생산적인 독자성을 확보한 사랑을 낭만적사랑이라고 해석한다. 낭만적사랑에 대한 규범은 근대 초기에는 소설이라는 매체속에서 서술되었고, 시간이 경과하면서 TV-대중가요-소설 등과 같은 다양한 현대적 매체속에서 표준적인 모델로서 주어진다.

 

 

7. 현대의사랑

사랑의 합리화와 상상력의 제도화 : 현대는 개인들의 모든 감각이 자본주의적 교환이라는 합리성에 지배를 받는다. 교환은 질적인 다름이라는 타자성을 화폐라는 동일성으로 치환할 때에만 가능하다. 따라서 현대인의 감각은 교환을 위한 화폐라는 동일성으로 통일되어 있다. 이런 동일성으로 치환된 감각은 개인들의 상상력도 각종의 상업주의적 대중매체에 의해서 동일하게 표준화시킨다.

문화산업은 사랑의 이미지와 스토리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반복하면서 은연중에 사랑의 감정을 정의하고, 그것을 어떻게 느켜야하는지, 어떤 규칙에 따라 표현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어휘와 수사로 묘사해야 하는지 가르친다.

사랑은 더 이상 남녀가 자발적으로 주고 받는 역동적인 상호작용으로부터 비롯된 직접적인 감정이 아니라, 문화산업이 중계하는 감정과 행위로 대체된다. 삶의 모든 영역을 물샐틈없이 에워싸고 있는 총제성 속에서 모든 것은 실재적인 것의 모조품으로 전락해 버린다. 그로 인해 사랑 안에서 감정의 자발성이 사라지고, 감정의 주체는 신체를 지닌 개인이 아니라, 자본주의 운동법칙이 되어 버렸다.

합리적 교환이라는 동일성으로 질적인 차이를 제거하고, 화폐라는 동일한 표준척도로 사랑을 표준화 시키면, 타자성에 대한 인식은 불가능하고, 이것은 사랑의 불가능을 의미한다. 사랑이 질적인 차이에 대한 타자성의 인식으로 부터 출발한다면, 그로 인한 자기정체성의 새로운 정립의 계기라고 한다면, 바디우의 정의처럼 그로부터 출발하는 끈질긴 타자성을 견뎌내면서 기성의 가치체계와 다른 새로운 창조의 행위라고 한다면, 현대는 그런 창조가 불가능한 교환이라는 동일성에 포박된 기성가치의 재생산 시스템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현대는 개인의 고유성 직접성 - 독자성 그리고 그에 기반한 타자적 이질성에 바탕을 둔 혁명적사랑 또는 낭만적사랑의 만성적불가능사회라고 규정할 수 있다.

 

. 사랑에 대한 교육학적 번역

<‘충조평판금지> : 앞의 글들에 의지해서 사랑이라는 개념을 정리하자면 타자의 이질성 또는 차이를, 나의 동일성 또는 주류사회적 가치관으로 환원하여 억압하지 않는 것 그리고 타자의 타자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관계의 충실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타자의 타자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 사랑하는 타자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태도라고 서술할 수 있다.

사랑에 대한 개념을 이렇게 정리해서, 이걸 교육학적으로 번역하면 <‘---금지>라는 학생지도론이 타자를 존중하는 사랑이라는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학교라는 독립적 기능체계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고 전통적인 학생 지도론은 기성의 사회적 가치체계와 행위양식을 이미 습득한 기성의 교사가 학생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충고하고-조언하고-평가하고-판단하고하는 지도에 기초해 있다. 이에 비해 <‘충조평판금지>는 학생 개개인의 자기 성장 가능성을 긍정하고, 자기교정 능력의 가능성을 긍정하고, 학생을 교사와는 또 다른 질적인 타자라고 보는 전제에 기초한다.

이질적인 타자성과 그 타자의 자유를 긍정하는 사랑이라는 개념에 비추면, 이런 <‘충조평판금지>는 학생을 교정(조작)의 대상으로 보는 기성의 학생지도론 보다 진일보한 발전적인 학생지도론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문제는 충조평판금지와 같은 지도론이 학생을 성적에 따라 균질화하여 계급재생산하는 기능에 치우친 현재 한국학교의 행태와 충돌한다는 것이다.

<‘충조평판금지>와 같은 학생관이 작동하려면, 인격의 자기완성이나 배움의 공동체라는 보다 심층적 교육환경의 복원 없이는 불가능하다. <‘충조평판금지>와 같은 논리들이 학교의 계급재생산기능에 의해서 사회에 대한 적개심으로 물든, 상처를 가진 학생들에게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다시 말해서 <‘충조평판금지>와 같은 학생지도론은 사회에 적대감을 가지지 않은 엘리트 학교의 학생들에서나 작동한다는 비판이 성립한다.

<‘충조평판금지>와 같은 학생지도론이 학생들 개개인의 타자성을 긍정하고 그들의 자유로운 자기성장의 기회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가지는 발전적 학생지도론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학교의 계급재생산 기능에 의해서 사회의 제일 밑바닥으로 배분-처분당한 학생들은 우선적으로 학교의 모든 행태에 대해서 분노로 대응하게 되어있다.

이런 현실을 고려한다면, <‘충조평판금지>와 같은 학생지도론은 제한적으로 해석되어야 하고, 학교의 본래적 교육기능인 자아의 자유로운 자기성장의 장소라는 기능 회복에 대한 관점을 우선적으로 확보하려는 노력에 우선할 수 없다. 그래서 새로운 학생지도 방법론으로 도입된 <‘충조평판금지>와 같은 것들이 작동할 수 있는 전제조건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가상임신과 같은 헛구역질에 불과하다.

학교를 인격의 자기완성이나 배움의 공동체로 자기완결성이 있는 독립적 기능체계로 복원하는 것이 우선이고, 한국 사회에서 그것은 사회적 지위배분 또는 지위재생산 기능을 해체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2020. 04. 6.

 

전 남 교 육 연 구 소 (책임작성자 : 이**)

사랑은하나가되는것인가 그리고 총조평판금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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