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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대기

복직 축하합니다, 그럼에도 남는 문제들.

복직 축하합니다, 그럼에도 남는 문제들.

9-16 복직 축하와 남는 문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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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직교사 3인의 복직을 축하합니다. 진심으로 축하해야할 일이지만, 그럼에도 해결해야할 여분의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남아있습니다. 축하에 빠져 그걸 챙기지 않으면 또 다른 우를 만드는 일이라는 기우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1. 전남도 교육청의 사과 문제.

대법원에서 전교조의 노조아님이라는 고용노동부의 7년전 달랑팩스공문한장시행이 잘못된 행정행위였다고 판결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일사천리로 각시도교육청에서 관련된 34명의 해직자들을 복직시키는 절차를 진행시키고 있습니다(물론 사립재단이나 보수교육감지역들은 이런 저런 지체현상들이 있습니다). 그에 따라 전남에서도 3인의 해직자에 대한 복직 절차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다 해소되었습니까? 그렇게 허접한 7년전의 달랑팩스공문한장시행을 아무런 군소리 하나 없이 그대로 따랐던, 그래서 34명의 교사들을 하루 아침에 학교 밖으로 내친, 그 무뇌아의 행위들은 아무런 조처없이 그대로 다 묻어놓아도 되나요? 과문해서 그런지, 당시에 그 행정행위들에 대해서 어느 시-도교육청이 혹은 교육부의 어느 관료가 일언반구라도 문제를 제기했었다는 걸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대법원 판결 이후에도 겨우 전북교육감 정도가 그것도 개인적으로, 당시의 잘못된 조치들에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따랐던 것에 대해서 후회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는 다시 돌아 온다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입니다. 이번일도 마찬 가지 입니다. 최소한 과거의 행위에 대한 책임있는 단위의 사과표명은 있어야합니다.

비교의 비대칭적 불균형이라는 비판을 무릎 쓰고 말하자면(34명의 5년간의 해직, 600만 대학살), 아우슈비츠 대학살의 주범인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고 아렌트가 탄식한건 악의평범성(the Banality of the Evil)’입니다. 파시즘 체제하의 아이히만으로 대표되는 평범한 관료적 충실성, 가부장으로서의 성실성이 600만 대학살의 원인이라는 한탄입니다. 물론 전남도는 그때 그 행정행위의 대표자가 바뀌었지만, 다시는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대표자의 입장표명 정도는 분명하게 확보되어야 합니다.

과거에 비해서 현대사회의 관료시스템은 워낙 세세하게 분화되어 있어서, 의사결정의 미세한 부분만을 감당합니다. 그런 미세함은 오류에 대한 책임소재로 부터 언제라도 면책될 수 있는 정당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현대의 관료 시스템은 면책을 위한 자기 정당화 시스템입니다. 이런 설명을 거꾸로 해석하면 관료 조직의 리더가 가지는 영향력의 과잉대표성입니다. 리더의 세계관이나 가치판단이 관료조직의 미세한 조정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관철될 수 있습니다. 베버식으로 설명하자면, 현대의 관료조직은 전근대의 주술적 종교로 부터 효율적인 기계적 과학이 되었습니다. 현대의 관료조직이 효율적인 기계적 과학이 된 그 만큼, 리더의 중요성은 그만큼 더욱 증대되었겠지요.

그래서 결론으로 말하자면, 이번 대법원 판결에 기대어 전남도교육청이 과거의 잘못된 리더쉽 행태에 대하여 크게 사과하는 사건으로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사과의 사건으로 조직전체의 의사결정 방향성을 잡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전남도교육청이 과거의 타성에 젖은 관행들을 되돌아볼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cf) 전라남도라는 지역사회에서 전교조위원장 출신의 교육감은 지역사회 진보적 교육운동의 축적된 과거가 폭발하는 하나의 사건이라는 새로운 의미의 탄생이다. 마찬가지로 이번 대법원 판결은 한국사회 전체 노동운동의 축적된 과거가 폭발하는 하나의 사건이고 새로운 의미의 탄생이다. 이걸 전라남도 교육청이 새로운 출발의 계기로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자 당위이다. 미래완료적으로 회고할 때 두번의 사건을 사건으로 만들지 못했다면, 두번의 사건은 전라남도라는 지역사회 진보적 교육운동의 스캔들로 귀결될 것이다.

 

 

2. 그래도 여전히 남는 해직자 문제

3명의 복직조처에도 불구하고 지역사회(광주-전남)에 여전히 남아있는 해직자의 문제가 있습니다. 광주의 배이상헌 선생님과 전남의 김남철 선생님입니다. 두분 모두 교사로서 그리고 시민으로서 기본권이 부정당한 사례입니다. 교사로서 직무수행이 그리고 시민으로서 정치적 기본권 행사가 교직추방의 원인이 되는 현실에 대하여, 최소한 광주시교육청과 전남도교육청은 피해자들의 대리 대표자로서 실정법에 맞서주었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거꾸로 잘못된 실정법의 대리 행위자로서 칼을 휘둘렀습니다.

광주의 배이상헌 선생님 건은 검찰에서 불기소로 결론이 나왔습니다. 교사의 수업관련 지식구성의 자율적 권한을 광주시교육청이 부정했고, 검찰은 광주시교육청의 그런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광주시교육청의 결정은 한마디로 자기부정의 극치입니다. 그걸 검찰이 바로 잡아준 코미디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김남철 선생님의 교사의 정치기본권 관련 사건입니다.

베를린에 있는 독일 국회의사당에 630명의 국회의원이 있습니다. 그중 81명이 교사국회의원입니다. 독일국회의 13%가 현직교사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사는 정치적 금치산자입니다. 정당에도 가입할 수 없고, 사소한 정치적 의사표명도 위법이라고 칼날을 맞습니다. 이런 교사의 정치행위에 대한 철저한 금지는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말로 포장되어있습니다.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수사는 개발독재라는 파시즘의 산물입니다. 교사가 정치적으로 가장 많이 동원된 시절이 박정희 시절입니다. 유신헌법을 설명하러 다니느라 교실을 팽개치도록 강요 받아온 시절을 과거는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교조의 출범에는 그런 상흔이 역력히 각인되어있습니다(“굴종의 삶을 떨쳐 반교육의 벽 부수고, 침묵의 교단을 딛고서 참교육 외치니,,,”).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수사 자체가 가장 정치적으로 오염된 언어입니다. ‘가장 중립적이라는 수학적 지식도 정치적 가치판단이나 개인의 정서적 영향으로 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은 현대의 지식에 대한 상식화된 통찰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정치적중립이 아니라 가치판단에 근거한 바람직한 정치적개입입니다.

그럼에도 교사를 정치행위을 빌미로 교단에서 내 쫓는 일은 중세적인 무지몽매함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게 실정법이라면 교사를 보호해야할 도교육청이 그 실정법에 문제를 제기했어야 합니다. 그것에 맞서 도교육청이 동원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제스처인 법률적 쟁송이라도 가보았어야 할 사안이었습니다.

정리하자면 우리사회의 교육관료 제도는 아직도 건실하고 자율적인 개인주의에 기반한 민주주의조차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봉건적인 중세와 파시즘적인 전체주의의 상처을 지속적으로 양산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것이 여전한 학교에서의 수직적 권위주의와 입시위주의 주입식 교육관행의 뿌리입니다. 3분의 복직을 축하하면서, 묵직하게 남아있는 것은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허구를 깨고,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시민으로서 교사의 정치기본권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2020. 09. 16

 

전 남 교 육 연 구 소 (책임작성자 :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