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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경치

민노당탈당

오늘로 나도 민노당을 탈당한다.
우리나라의 허접한 교육공무원 법이 교사의 정치활동을 불법화하고 있다.
그런 처지로 정식 당원도 아니고, 당우로 활동해왔다.
어짜피 지난 대선에서도 한국사회당을 지지했다.
민노당에 당우로 있으면서 뭔가 몸에 안맞는 옷과 같은 찜찜함이 있었다.
한국사회에서 통일문제는 더이상 진보의 의미를 상실했다.
실제 현실에서 통일을 추동하는 가장 큰 힘은 자본이다.
남한 자본주의의 이익율 제고를 위해서 통일은 가장 쉬운 돌파구다.
현시기에서 어떤 형태의 통일운동이든 자본의 자기운동의 하위 파트너로 기능할 수 밖에 없다.
그런 통일의 결과는 남한 사회의 확대재생산이다.
나는 그런 방향에 동의할 수 없다.

언젠가 민노당 당원과 정치적으로 이 세상 누구보다 친밀한 관계를 맺은적이 있다.
그가 나에게 민족의 제단에 함께 삶을 바치자고 말했다.
허걱, 기절초풍할뻔 했다.
민족이 그에게 또 하나의 봉건적인 가부장적 의식의 대체물이었다.
누구 보다도 진보적이라는 그는 또다른 가부장주의자에 다름 아니었다.
내가 아는 민노당 기간당원들의 의식이 대부분 이렇다.

새로운 진보 정당이 나에게 얼마나 잘 맞을지는 모르겠다.
최소한 자주파헤게모니로 똘똘 뭉친 민노당 보다는 나을거라는 생각이다.
나는 맑스의 계급투쟁론에 기댄 구좌파의 정치의식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계급 없는 사회란 존재할 수도 없고, 그런 기획이 결국 더 지독한 전체주의 사회를 낳았단게 역사의 교훈이다.
나는 이 역사의 교훈에 동의한다.

내가 그리는 혁명이란 미시적 수준에서 다양성이 약동하는 그런 사회다.
사회적 소수성이 사회적 다수성으로 약동하는 그런 사회다.
누구나 자유롭게 차이를 생성하고, 차이들이 자유롭게 약동하는 사회다.

내가 그리는 사회는 사람 하나 하나가 국가주의로 호명되지 않는 사회다.
사람 하나 하나가 그 자체로 소중하게 존중 받는 사회다.
현재와 같은 자주파 중심의 과도한 애국주의적 정조의 국가주의는 결국 파시즘체제로 변질될거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80년대 학생운동이 또 다른 파시즘이 아니라고 나는 부정할 자신이 없다.
현실 주류세력의 국가주의도 지긋지긋한데, 진보정당이라는 민노당의 국가주의도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게 내 정치적 판단이다.

나는 미시적 수준의 일상생활에서 변화와 차이가 생생하게 약동하는 그런 혁명을 꿈꾼다.
새로운 진보 정당에 그런 공간이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거기서도 실패한다면 또 다른 실험을 마다하지 않을거다.

안녕 --- 민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