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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영화보기

무능의 진실

유능한 당신 행복한가?

지난 봄에 신영복의 책 '나의 동양 고전 독법'을 만났다.
신체에 깊이 새겨진 '유교적 생각'에 대한 생래적 반감이 있다.
어렸을적 씨족 마을 비슷한 가족 환경에 대한 반감에 뿌리를 두고 있으리라.
우리 사회의 누구나가 그렇듯이, 충실하게, 학교라는 근대화기구가 새겨 넣는 이데올로기의 내면화는, 피할 수 없는 시간이다.
그 과정에서 모든 과거는 거지 발싸개가 된다.
서구적 modern을 향한 질주가 일상적 선택의 준거다.

내 도회 지향적 감수성은 그런 과정에서 길러졌다.
그게 내 신체에 축적된 무조건적 감응 세포의 반 이상이다.

무의식적인, 그런 몸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요구가 신영복의 책에 다가서게 했다.
챞터를 하나씩 요약 정리하면서 반복적으로 읽었다.
책에 매몰되어 거리감을 상실하고 가지 하나씩 잘랐다.


구글 이미지 검색에서 '유능'이라는 단어를 치자 노트북 이미지가 첫 페이지에 나왔다.
다시 '삼성노트북'이라는 검색어를 치자 위의 이미지가 떴다.
스크린에 있는 '디지털 유목민'이라는 로고를 보자 실소가 나왔다.
'유목민'이라는 단어는 체제(자본주의)에서 미끌어지는 삶을 권유하는 최근의 대표적인 단어다.
원조는 프랑스이고, 우리 나라에서는 최고의 전위적 진보진영이 퍼트렸다.
체제(자본주의)란 이탈하는 탈주선을 포획해서 생존의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분열증이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그러다가 오늘 문득 거리감에서 오는 원거리 경치를 하나 확보했다.
왜! 고전의 인물들이 모두 실패자인가?
공자, 맹자, 이사, ---, 한비자, 묵가, 노자, 장자.
왜! 그들은 현실속에 실패자로서의 삶을 살았을까?
너무 뻔한 질문을 하나 얻었다.

당시에는 그들의 삶에서 뭔가 현실을 장악하는 기술적 지식을 원했다.
그러니, 책 전체를 관통하는 모든 실패자라는 고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텍스트란 단지 해석의 대상이다.
텍스트 넘어 텍스트가 가르키는 본질이란 없다.
텍스트 저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제는 상식이 되다시피한 언설이다.

신영복의 책이란 당시의 나에게 시속의 현명함을 적시하는 텍스트로 다가왔다.
내 권력의지가 그렇게 그 책에 작동했다.
고전속의 인물들이 성공에서 미끌어지는 지점에 집중하였다.
그들처럼 성공에서 미끌어지지 않기 위해서.
그게 신영복과 갈라지는 신영복의 '동양고전독법'의 '독법'이었다.

다시 그 책을 읽는다면 다른 관점에서 실패에 집중하겠다.
현실속에서 그들의 실패는 성공의 또 다른 이면이다.
체제와 불화하지 않고 성공의 길을 갔더라면, 그들은 시대의 진실을 보지 못했을거다.
시대에 묻혀서 그 속에서 허우거리며 삶을 살았을거다.

대부가 되기를 그렇게 열망하면서도, 끝내 변변한 대부가 되지 못했던 무능한 공자가 애뜻해진다.
그래서 그는 비로소 공자가 되었다.
이게 예전에는 공자의 모순이나, 위선으로만 읽혔었다.
천하통일을 완수한 법가의 이사는 결국 자기가 만든 법에 목숨을 내 놓아야 했다.
이사는 그런 완전한 무능, 실패를 상상이나 했을까?


구글에서 무능이라는 단어를 치자 첫 화면에 뜬 이미중의 하나다.
만일 시간이 매체라면, 시간만큼 삶을 무능으로 결론 내릴 매체가 있을까?
또 시간만큼 삶을 무능에서 유능으로 환생시킬, 구원할 매체가 있을까?
무능과 유능의 사잇길을 진자운동(시간) 처럼 살아 내는 것이 진리를 물리치는 길이다.
니체가 말한 '삶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일 것이다.
삶은 무능이라는 피할 수 없는 세계속을 '몸'으로 구멍내서, 내파하는 일이다.



무능은 체제와 불화한다는 말이다.
체제에 포섭된 모든 인간의 삶은 어떤방식으로든 체제와 불화한다.
유능한 삶이란 체제가 주는 보상을 많이 획득하는 삶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 삶이 체제가 주는 마모와 폐기를 피할 수 있을까?
그런 길은 없다.
그 보상이란 기껏해봐야 체제내에서 이루어지는 또 다른 삶의 마모와 폐기의 회로속을 맴돌 뿐이다.
결국, 모든 삶은 무능하다.

이런식의 거대한 형이상학은 현실을 뚫고 갈 실천의 맥락을 모두 사상시킨다.
오히려 현실체제의 포섭에 굴복하게 만든다.

삶이 모두 무능하다면, 그 무능한 사잇길을 살펴야 한다.
유능과 무능이 뫼비우스의 띠 처럼 서로 인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뫼비우스의 띠 '밖'을 상상할 수 '밖'에 없다.
그 '밖'이란 유능과 무능 사이에서 흔들리는 거다.
유능을 향한 질주도, 무능을 향한 질주도 서로 만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무능과 유능 사이에서 진자처럼 흔들리면서 매 순간을 살아내는 수 밖에 없다.
그게 궤도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엇갈려 가는 무능이, 결국 무능인 삶의 마모속에서 그나마 확보할 수 있는 생산적인 길이다.

체제에서 엇갈려 가야 체제를 볼 수 있다.
체제에서 비켜가야 체제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다.
이게 그나마 삶이라는 것의 무능에 난 보이지 않는 사잇길이다.
무능이라는 덤불속에 그 사잇길을 뚷어 내는 것 그것이 삶이다.

결국, 무능이란, 시간이라는 매개 변수를 통해서만 판별할 수 있다.
결국, 무능이란, 시간의 진자처럼 유능과의 사이를 운동하지 않을 수 없다.
최종적으로, 그래서 무능이란 없다.
어긋나면서, 무능이라는 숲에서 사잇길을 걷는 삶이 있고, 그 삶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 뿐이다.
주어진 삶을 회피하지 않고 살아낸 모든 삶은, 그래서 위대한 유능이다. 

체제 속에서 무능의 감수성을 잃어버린 당신 행복한가?
체제에 잘 길들여져 불화의 본능을 잃어버린 당신 행복한가?

cf)  이 글은 김영민의 책 '동무론'에 기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