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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경치

도망가고 싶은 날


어떤 관료 ---김남주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상을 받았다
반평생을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나치의 파시즘이 독일을 지배하던 시절 6백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습니다. 학살의 양상이 너무 처참해서 평범한 상상력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종전 후 유대인 학살에 관계한 공무원들을 조사해봤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대부분 선량하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웃의 가장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례들 중의 하나가 아이히만 재판입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에 관련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고 진술합니다. 오히려 명령 받은 업무를 태만하게 처리했다면, 그것에 대해서 죄책감이 들었을 거라고 말합니다.

날씨가 몹시 덥고 끈적거렸던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한 시간 내내 아이들에게 짜증내고 호통치다가 문득 종료 시정 소리와 함께 교실을 나서려던 순간입니다. 아이들의 시선이 뒷덜미에 뜨뜻하게 느껴졌습니다. 문득 아이들에게 내가 아이히만 같은 존재는 아닐까?라는 생각에 휩싸였습니다. 그런 감수성으로 2년여를 더 버텼습니다. 20여년도 더 지난 노태우 군사정권시절 해직당할 때, 불의한 체제의 하수인만은 되지 말자고 결심했었습니다.

뜬금없이 그 시절이 자꾸 회상됩니다. 아마 이 때쯤 학교에서 짐을 쌌던 것 같습니다. 날씨는 덥고, 날마다 비는 주룩 주룩 내리던 장마철 이었으니까요. 성실하고 착한 어느 선생님이 아침에 교원평가 문제로 누군가를 쏴 버리고 싶다고 하소연합니다. 일제고사는 내일 모래고, 교원평가는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라고 독촉합니다. 학교 현장에 학생과 교사에 대한 통제와 관리감독을 강화하는 동물사육 정치학이 갈수록 기승을 부립니다. 아도르노가 그랬나요?  현대인은 모두 도구적 이성의 노예라고! 우리가하는 일들의 목적이 합당한가에 대한 비판은 우리에게 한낮 사치일까요? 시키는 일, 입 닥치고 성실하게 수행하는게 잘 사는 걸까요!

어딘가로 도망가면 안될까요?
이렇게! Escape : Esc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