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읽기-영화보기

선택 : 노예되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색다른 음식

나는 내일 모래면 50대가 되는 노털이다.
시골에서 성장했고, 젊었을 때 몇년간의 서울 생활을 제외하면 나머지 모든 시간을 전라도 궁벽한 곳에서 보냈다.
그러다 보니 내 음식 취향은 맴고 짜고 골골하고 시큼털털하다.
이런 음식 말고 다른 음식은 거의 상상하지도 않고, 시도하지도 않는다.
외국에 나갈 때에도 고추장이나 된장 같은 것들을 잔뜩 싸가지고 가야 안심이 된다.

얼마전에 나하고는 음식 취향이 다른 사람이 퓨전서양음식점을 가잔다.
처음에는 당연히 싫다고 버텼다.
쪼잔하지 않은 사람은 색다른 음식에 개방적이라는 설득에 결국 굴복했다.
그때 내부에서 한국남자들의 전형적 속성인 마초적 기질이 작동해서, 쪼잔하다는 평가를 듣기 싫어서, 나는 할 수 없이 낮선 퓨전서양음식을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한국남자들을 진짜로 쪼잔하게 하는건 그런 마초적 속성이다)

낮선 퓨전서양음식이 예상과는 달리 맛있었다.
가격도 내가 평소에 고집하던 음식 보다 반 이상으로 저렴했다.
고추가루도, 된장도, 젖갈도 하나 들어가지 않은 음식인데도 불구하고 색다른 맛이 있었다.
색다른 매운맛, 색다른 짠맛, 달콤한 맛 들이 조개 오징어 당근 브로콜리 등등과 어울려 입안을 즐겁게했고, 색다른 감각을 일깨워 줬다.

그때 알았다.
내가  음식에 대한 고정된 편향적 습관을 가지고 있었구나!

음식에 대한 고정된 편향성을 버렸더라면 아마 나는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거다.
음식에 대한 취향이 협소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만나는 사람들도 훨씬 다양해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내 삶도 그 만큼 훨씬 풍부해졌을 거다.

지금은 새로운 아무 음식이나 자유롭게 대면할 준비가 되어있다.
시장 뒷골목 허름한 식당에 처박혀 술먹고 밥먹는 취향을 버리지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묶여 있지는 않을 것 같다.

오라 새로운 음식들아! 오라 새로운 사람들아! 오라 새로운 생각들아! ----. 내가 간다!
(단, 빈대 붙을 때만! ㅎㅎㅎ )

아방가르드(avant-garde)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별빛 찬란한 밤(Starry Starry Night)" - 고흐 -
(인상주의 화가중에서 고흐의 작품은 그래도 사물의 형태가 분명하다. 고흐가 인상주의 화가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고흐는 숭고미를 추구한 측면이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이 빛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사물의 임의적 형태성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사물의 형태가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에 비해서 우뚝서는 느낌을 준다. 인상주의의 초기작품인 모네의 그림들은 사물의 형태가 거의 사라진 느낌을 준다. 20세기 후반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세계의 실체성에 대한 부정을 극한까지 밀어 붙인다. 그점에서 19세기말의 인상주의 화가들로 부터 시작된 현대회화의 흐름과 현대철학의 흐름은 서로 닮았다. 밑에 그림이 인상주의를 열었다는 모네의 해돋이라는 작품이다.  ---- 진중권에 기대어 씀 ----)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해돋이" - 끌로드 모네 -

영어로 번역하면 advance guard 정도가 될 것 같다.
글자 그대로 제일 앞에서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전위병사'라는 뜻이다.
아방가르드 예술을 우리는 그냥 아방가르드라고 부른다.
모든 예술은 아방가르드적 속성을 가진다고 한다.
아방가르드적이 아닌 것은 예술이 아니라 그냥 모방이라고 한단다.

아방가르드 예술이 언어로 짜여진 정연한 논리적 철학보다 우월한 어떤 것이란다.
여기에는 설명이 좀 필요하다.

사람들은 논리적 이성 보다는 감각적 느낌에 훨씬 친화적이란다.
정연한 논리가 아무리 치밀하고 그럴듯해도, 그런 논리가 미치는 영향력은 아주 미약하단다.
이에 비해서 감각적으로 느낀 어떤 느낌은 즉각적으로 사람의 행동변화를 일으킨단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른다.
단지, 언어적 접근이 자아라는 수준의 이성에 대한 자극일거라고 생각한다.
이에 비해서 감각에 대한 호소는 무의식을 흔드는 심층적 자극일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직관적 감각으로 느낀 불쾌나 유쾌가 이성적으로 추리한 옳고 그름 보다 훨씬 정확하다는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실조차도 논리적 추론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그냥 직관적 판단으로 아는것 같다.

아방가르드 예술은 그런점에서 논리적인 철학적 설명보다 훨씬 영향력이 크단다.
아방가르드 예술은 직접적으로 우리의 감각에 새로운 자극을 불러 일으킨다는 거다.
이에 비해서 철학은 이성적 수준의 자아를 건드니, 철학이 예술의 하수인 것은 분명해보인다.

진중권의 미학강의에서 배운거다.
19세기 말 인상주의의 시뮬라르크적 표현기법을 구태여 철학적 사조와 비교하자면 20세기말 포스트모더니즘과 정확히 일치한단다.
그래서 미술이 철학을 거의 100년을 앞서 있단다.
왜 미술을 'fine art(순수예술)'라고 말하는지 알 것 같다.

한 순간의 새로운 감각적 자극이 어떤 인간을 훨씬 심오하게 흔들 수 있다는 것다.

이걸 알고 있는 아방가르드적 예술가들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훨씬 막강한 존재들이라는 거다.
유럽의 지성사를 뿌리로 부터 흔든 니체의 책 수십권 보다도, 그런 니체를 200년이나 지나서야 새롭게 읽고 해석하기 시작한 200년 후의 현대 지성의 총아라는 들뢰즈 가타리 등등 보다도 아방가르드적 예술가들은 가볍게 단 한 순간에 이미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건너 뛰어갔던 사람들이라는 거다.

얽매인 자유

(안스 마르쿠스의 '얽매인 자유'라는 그림이 있다.
진은영의 책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88페이지에 실려있다.
네이버와 구굴에서 이미지검색으로 찾으려했으나 실패했다.
이미지를 대충 설명하자면 붕대 같은 천으로 온몸을 칭칭동여매고, 그네에 앉아 허공에 매달려 있는 허무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그림이다.
그네를 박차고 허공을 가르는 자유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가 없다.
그림에서 우울한 정조가 뚝뚝 묻어 나온다.
세상에 묶여서 꼼짝 달싹을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린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세상으로 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우리가 사실은 세상에 포박당하여 살아가는 부자유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려는것 같기도 하다.)

인간이 단 한순간의 감각적 자극만으로도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수 있다.
이런 감각적 쇄신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다.

안스 마르쿠스는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려는 것 처럼 보인다.
인간은 스스로 노예이기를 선택한다고 말하려는 것 처럼 보인다.
인간이 스스로 노예되기를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란다.
인간은 개선을 개악 만큼이나 무서워한단다.
현실이 최악의 상황이라할지라도 그것을 편안하게 느낀단다.

나는 그것을 이번 대선이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지난 10년간의 허구적 개혁정권이 사람들에게 아방가르드적 감각의 쇄신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
개혁에 대한 전망이나 기획이 박정희체제라는 본질적 문제를 건드리지 않았다.
김대중은 박정희 기념관을 짓는다는 상징으로 표현되듯이 박정희체제와 타협했고,
노무현은 신자유주의 좌파정권이라는 형용모순적 고백에 드러나듯이 FTA를 통한 강한대한민국 창조라는 식으로 박정희 체제와 타협했다.

진실을 말한다면 지난 10년간의 허구적 개혁정권은 박정희체제적 감각을 지속적으로 강화시킨거다.
이런 결과가 최근의 정치지형으로 나타난거다.
우석훈이 말하듯이 총선을 통해서 완성될 박정희식 파시즘 정권은 극우파시즘 성향의 한나라당과 유사한나라당이 싹쓸이를 할거다.
아방가르드적 진보정당은 현실적으로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상황으로 귀결될거다.
다중의 감각이 그렇게 거의 100년 가까이 고착되어 있다면 그렇게 현실이 표현되는게 당연하다.

이런 상황에서 현실을 바꾸는 운동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할까?
과거를 깨끗이 잃어버리는 것 외에는 새로운 방법이 없다.
지금까지의 실험이 모두 실패했다고 인정하는거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과거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잊어버리는거다.
니체는 망각은 과거를 극복하는 능력이다고 말한다.
그는 망각의 능력은 현실을 털고 새롭게 태어나는 처음 출입구라고 생각한다.

다음은 새로운 감각을 개발하는거다.
새로운 감각의 개발이란 당연히 아방가르드적 실험이다.

새로운 실험이란 당연히 자신의 변화를 수용하는거다.
지금까지 고착되어 있었던, 그래서 현실에 안주할려는 노예되기를 버리는거다.
된장, 고추장, 젖갈이 만들어 내는 맵고, 짜고, 골골하고, 시큼털털한 맛이 아무리 유혹적이라 할지라도 새로운 퓨전음식을 시도하는걸 두려워하지 않는거다.

그런데 이런 새로운 실험을 두려워하고, 그것이 최악의 것이라 하더라도 기존의 고착된 행동인 현실에 안주할려는 습성은 어디서 발생하는가?
왜 인간은 안스 마르쿠스의 그림처럼 노예되기를 스스로 선택하는가?

그것은 새롭게 뭘 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니힐리즘(허무주의) 때문이란다.
니힐리즘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런 니힐리즘이 최악이란다.

이런 니힐리즘에 빠지면 세상을 그저 조소하면서 새로운 무언가를 할려는 어떤 시도도하지 않고 그저 현실에 굴복해서 무위도식하면서 사는 행동양식을 보여준단다.

니체는 이게 근대문명이 만들어낸 가장 극복하기 힘든 전형적 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이걸 극복하는 길은
첫째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깨는거다.
둘째는 현실을 부정하고 현실 이상의 무언가 천상의 것이 있다는 허구적인 종교적 태도를 버리는거다.
세째는 변화와 생성이 일차적 본질이라는 생각을 가지는거다.

cf) 진은영의 책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1부 : '니힐리즘의 극복과 영원회귀' 읽기를 마쳤다. 이 글은 거기에 기대어서 쓰여졌다.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의 방대함과 풍성함에 짖눌려 겨우겨우 진도를 나가고 있다. 이럴때 선생을 만나면 편하게 공부할 수 있을텐데!
내가 우석훈을 지지하는 것은 그의 아방가르드적 기질 때문이다. 매체에 실린 사진도 그렇고, 글의 문체도 미친놈 널 뛰듯 한다. 그리고 문제를 포착하는 시선도 치밀한 논리가 아니라 직관적인 붕붕 날기가 눈에 선하게 보인다. 그래서 그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고 그를 따라  잡을려고 노력한다. 최소한 그가 한국사회의 새로운 진보흐름을 만들어 낼 것 같은 기대가 든다.
우석훈을 지지하는 또 다른 이유는 실패의 경험이다. 나는 지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노무현을 지지했었다. 그게 현실에서 처참하게 깨지는 걸 보면서 민노당을 바라 보았다. 민노당에 대한 기대는 이번 대선에서, 그리고 평소 좀 알고지내는 민노당 통일지상주의자들의 행태를 보면서 접었다(나라는 사람이 원래 기질적으로 좀 가볍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다른 어떤 흐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지금 당장은 우석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그가 새로운 진보의 흐름이라도 만들어 내기를 바란다.
니힐리즘을 극복하는 시각을 니체나 니체 따라쟁이들(모든포스트모더니즘주의자)이 제시하는것은 분명하다. 그 내용을 결론으로 쓸려고 했는데 내용이 너무 방대하다. 그래서 요점만 썼다. 그리고 니힐리즘을 극복하는게 결국은 삶의 선택의 문제이다. 노예의 삶을 살거냐?, 아니면 내 삶을 살거냐?의 선택의 문제이다. 그래서 아무리 논리로 설명해 봐야 한계가 있다. 마음의 준비만 되어 있다면 최종결론인 마지막 문단을 조금만 생각해봐도 니힐리즘을 극복하는 생각을 충준히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르치려들어서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