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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경치

근대성(모더니즘)

세상에 나온 이래로 나는 모더니즘에 매여 있었다.
30대 이후로 모더니즘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모더니즘에서 완전히 이탈했다.

근대성(모더니즘)을 단순하게 정리하면 '민족주의, 이성주의, 가족주의'일 것이다.
임의겠지만 '민족-이성-가족'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야할 필요가 생겼다.


1. 민족

민족문제가 가장 근원적인 사회모순의 뿌리라는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민족문제는 여러가지 사회문제 중의 하나다.

중세를 가로질렀던 우주와 자연 그리고 인간의 소통과 같은 사유속에서는 민족문제 자체가 아예 자리잡을 여지가 없었다.
제국주의의 침략과 함께 갑자기 민족문제가 출현했다.
본격적으로 19세기 전후로 민족이라는 언어가 지배적인 화두로 출현했다.
당시, 민족을 구체적 현실속에서 확증해줄 민족국가는 부재였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해서 빼았긴 부재의 대상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민족과 한이라는 정서가 단단하게 결착한다.
한이 민족이고, 민족이 한이다.
한의 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출현하는 사회역사적 배경이다.

해방이 제국주의 세력간 전쟁의 정리과정에서 타율적으로 주어졌다.
그 1945년 이후 민족문제는 변형된다.
민족이 분단된 채로 서로 다른 2개의 국가를 설립했다.
이렇게 되니, 민족문제의 해결은 민족통일 이라는 문제로 설정된다.
통일이 모든 역사적-사회적 모순의 근본으로 설정되었다.

민족문제를 중심에 놓는 사유들은 강력한 국가주의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한나라당이건, 민주당이건, 민노당이건 그들 사유의 뿌리에는 강한 대한민국이라는 정서가 깔려있다.
이재오, 김문수 등등의 열렬한 80년대 민중운동 진영의 운동가들이 쉽게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변경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어찌보면 정치적 입장을 변경한게 아니고, 처음부터 일관되게 정치적 입장을 견지한거다.
이런식의 잣대로 단순하게 한국의 현실 정치지형을 분류하면, 95%의 우익과 5%의 진보신당-사회당-좌파다.
북한의 강성대국 같은 구호들과 남한 극우파시스트들의 구호는 동일한 사유에 기반한다.
사유의 동형성을 가지고 있다.
장기적으로 민족문제을 중심으로 사유하는 입장들은 현실에 대한 보수주의로 수렴된다고 보아야한다.
제국주의적 외세 침략에서 산출된 민족이라는 문제의식은 제국주의를 중심으로 도는 구심력에 포획된채 운동한다.
독일이나 일본과 같은 후발 제국주의 국가들이 걸어온 길이다.

그런점에서 한국의 진보진영은 다른 상상을해야 한다.
민노당 주류세력의 구태한 생활양식이나 가치관의 뿌리를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환경, 계급, 양성평등, 청년실업, 다인종사회 등이 민족문제라는 의제에 수직적으로 하향 계열화되는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

19세기나 20세기의 제국주의적 세계라는 현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민족문제가 억압 받는 소수자를 대변하기 보다는 민족문제가 소수자를 억압하는 세상이 탄생했다.
이제는 민족문제를 지워야 한다.

2. 이성

세계를 합리적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
세계를 합리적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중심주의의 뿌리다.

데카르트의 근대 이후로 '생각하는 나'라는 인간 또는 주체는 모든 사고방식의 가장 심층적 근거가 되었다.
이런 식의 사고는, 나와 나의 외부를 분명하게 가르는 분절선을 낳는다.
나라고 설립된 인간은 나의 외부인 자연을 이성으로 인식하고 파악해야할 대상으로 간주한다.
합리적 이성에 의해서 파악된 외부는 내가 관리-통제햐야하는 대상적 영토가 된다.
나라는 인간과 그 외부인 자연이 서로 대립적인 관계로 설정된다.
근대적 이성이 만들어 낸 모든 지식은 이런 사고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현대문명이라는 성과들이 탄생한 배경이다.

인간의 이성이 낳은 자연지배는 극한지점을 통과하고 있다.
더 이상 지배해야할 외부의 자연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이 출현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의 외부를 스스로 창출하고 있다.
인간들의 사이 공간이 더 이상 자연이 아니다.
인간들의 사이 공간이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물이다.

인간들의 사이 공간이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물이라는 말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백남준. TV나무. 강남포스코 건물에 설치.

백남준은 '예술의 반은 사기'라고 말한다.

사기라는건 대중을 정신적 혼란에 빠트린다는 말일거다.

정신적 혼란, 정신적 충격을 통해서 기존의 구태한 인식을 허물고 새로운 인식의 세계로 안내하려는 열망이 그의 아방가르드적 작품의 지향점일 것 같다.

이 작품은 나무가 자연물이 아니고, TV라는 첨단 이미지매체라고 말한다.

백남준 이전에도 세계는 더 이상 자연이 아니라 인공적인 이미지라는 언설은 수도없이 많았다.

시뮬라르크로서 세계는 인간이 만들어 낸 이미지들의 세계다.

우리가 일상으로서 대면하는 사물은 더 이상 자연으로서 세계가 아니다.

인공적으로 가공된 이미지들에 의해서 세계를 이해하고 학습한다.

백남준의 이 작품은 세계는 더 이상 자연이 아니고, 인공적인 무엇이다,는 선언이다.

사람들의 TV시청 습관을 조금만 관찰해도 그 점을 금방 간취할 수 있다.

현대를 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루중 상당한 시간 동안 TV를 시청한다.

TV라는 매체 자체가 워낙 감각적 강렬도가 높다.

아무런 반성적 성찰과정 없이 TV이미지들은 곧 바로 사람들의 몸에 각인된다.

그렇게 신체에 각인된 이미지들에 의존해서 행동을 습관화하니, 사실상 인간들 사이공간인 자연은 매체이미지라는 말이 진실인 세상이다.

매체이미지의 막대한 영향력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의 모든 공간은 인공적이다.

인공적으로 조형된 공간에 배치된 사람들은 그 공간의 설계 의도에 따라서 행동을 표준화 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더 이상 사실로서 자연은 없고, 인공으로서 자연이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메트릭스류의 SF영화가 아니어도 조지오웰의 1984년 같은 우울한 묵시룩은 이미 여기가 아닐까?)



이성을 통해서 자연을 지배하고자 했던 결과가, 인간이 인간을 통제-관리하는 현실을 낳았다.
근대이성에 대한 비판이 이성을 비판하는 대목이다.
근대이성을 비판하면서 대안으로 '몸'을 내세우는 지점이다.
몸으로 생활하고, 몸으로 느끼고, 몸으로 판단하라는 말이다.
'푸코가 인간을 지워야한다'고 말할 때, 그 인간은 근대적 이성으로 사유된 '나'라는 존재다.

문제는 내 신체가 워낙에 근대적 문명에 결착되어 있다는 거다.
문명이라는 메트릭스에서 내 몸은 문명이 길들인 취향을 더욱 편안하게 생각한다.
내 몸은 차라리 메트릭스의 조종을 받는 노예이기를 원한다.

노예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런 신체를 바꾸는 수 밖에 없다.
그게 김영민이 말한 공부고, 몸의 단련이다.

근데 이게 영 자신이 없고, 그러고 싶지 않다.
차라리 메트릭스 속에서 편하게 살다가 죽고 싶다.
설령 노예의 삶을 산다해도!
이게 거의 모든 사람들의 생활습관이다.
 
 3. 가족

중세 까지도 신체는 마을 공동체에 속해서 구성되었다.
근대 이후로 내 몸이 독립적으로 파악되고, 그 연장 선상으로 가족이 탄생하였다.
마을이나 도시 공동체가 해체되고, 가부장-아내-자식으로 이루어진 가족 공동체가 탄생했다.

근대의 대표적인 사회체제인 자본주의는 가족이라는 사회단위에 기초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남성 노동자가 받는 임금은 가족 재생산에 필요한 재화의 양을 기준으로 한다.
도시 노동자의 평균임금 같은 개념들은 가족재생산에 근거들 두고 있는 전형성이다.
남성 가부장을 통해서 여성을 관리하는게 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성별 관리 방식이다.
결과로 자본주의 근대사회에서 남/녀 불평등은 단순한 사회적 관행이 아니다.
남/녀 불평등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체계적 관행이다.

가족 내에서 아이들이 받는 보호-관리 대상으로서 역할극도 여기에 기반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체계에 합당한 행위는 격려 받고, 거기에 충돌하는 행위는 금지당한다.
가족이 학교체계와 밀접하게 연결되는 접합점도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의 습관화다.
가족이 근대적 자본주의 사회체계의 핵심이란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근대적 사회체계에서 미끌어지면서 주류적 가족제도와 불화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대안적 가족에 대한 상상력을 길러야한다.
다른 형태의 몸들간의 배치가 불가피해 보인다.

몸이 워낙에 타자와의 관계를 통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 무엇이다.
'타자의 시선은 지옥이다(사르트르)'고 하더라도 몸은 그 자체로 공동체적이다.
혼자서 완벽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는게 몸이다.
주류적 가족 제도와 불화한다면 몸들은 어떤식으로 연대 또는 공동체성을 확보해야 하나?

그게 새롭게 만들어내야 할 그 무엇이다.

김영민은 아마 '이드거니 몸을 끄-을-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리라.

cf) 내가 아는 근대성에 관한 최고의 작품은 고미숙의 '나비와 전사'다.
확실히 고미숙 같은 젊은 연구자들이 백낙청 같은 대가들을 극복해가고 있다.

나비와 전사. 고미숙. 그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