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책을 읽는 일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사실을 중립적으로 죽 늘어 놓고, 그걸 하나의 논리로 꾸러미를 만든다.
그런 과정이 마치 다큐멘터리의 시선과 비슷하다.
그렇다고 죽 늘어 놓은 사실들이 가치 중립적 진실은 아니다.
어떤 사실은 선택되고, 어떤 사실은 배제하면서, 너무도 분명하게 가치가 개입된다.
단지 열거된 사실들 때문에, 저자의 가치개입행위가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결국 어떤 역사서술도 가치중립적일 수는 없다.
'조선선비 살해 사건'에 개입하는 이덕일의 시선은 유학자들에게 있다.
조선 초기에는 사대부라 불렸고, 후에는 사림이라 불렸던 집단이다.
이덕일이 선택하는 사실들인 조선선비들은 그가 짜는 베의 씨줄과 날줄이다.
대체적으로 치졸한 왕들과 훈구공신의 폭력은 그가 짠 베에 뿌려진 물감이다.
조선이라는 옷감에 뿌려진 폭력의 상흔 중에서 가장 선명한 선혈은 정도전과 조광조의 것이다.
정도전은 이방원에 의해서 아무런 절차도 없이 그냥 살해당한다.
이성계를 발탁했던 실제 조선개국의 설계자가 전조도 없이 사라졌다.
술먹고 놀다가 이유도 설명도 없이 그의 피는 뿌려진다.
조광조는 끝까지 중종의 배신을 티끌만큼도 의심해보지 못한다.
눈치없이, 그는 중종에게 백치의 순수한 사랑을 품었다.
택도 없는 순수함은 무능하지만, 급진적이다.
죽는 그 순간에도 그는 중종을 먼발치 애인의 발자국 소리마냥 기다린다.
중종은 그게 겁이나고, 피곤했을 것이다.
물리적 힘으로 뒷받침 받지 못했던 그들의 꿈은 언제라도 그냥 꺼져 버릴수 있는 신기루였다.
그것을 알기에는 그들은 순수하고 강직한 문사였다.
그래서 문약은 피할 수 없는 함정이었다.
결국 조선이 살해한 두명의 선비는 정도전과 조광조다.
살해당한 두 선비는 조선후기 사림이 확고하게 지배세력이 되는 뿌리가 되었다.
이들의 죽음은 조선이 선비의 나라로 가는 디딤돌이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 이덕일의 카메라에 잡힌 조선의 선비, 정도전과 조광조의 비극적이면서 숭고한 아름다움이 어른거린다.
cf) 정도전이나 조광조에 비하면 박지원은 얼마나 능청스러운가?
문약이라는 약점을 그는 의뭉하게 뭉게버린다.
정조의 구애를 그는 끝내 모른척 외면한다.
박정하게 내치는 대신 그는 허수룩하게 놀아 버린다.
아니면 그걸 받는 순간, 그와 맞서 이기든지, 그에게 죽든지의 길 '바깥'이 없다는걸 알았을 거다.
그래서 그는 정조를 외면하는 나비가 되기로 한다.
잡을라치면 날아가고 또 날아가는 나비는, 정조에게 얼마나 매혹적이었을까?
정조의 문체반정은 박지원을 잡고자하는 그물이고, 박지원은 허망하게 날아가 사라진 나비다.
그 나비의 아름다운 비행 흔적이 박지원의 문체였을거다.
새시대를 꿈꾸어야하는 그 문체는 불가피하게 껄렁하고 가벼울 수 밖에 없었을 거다.
그게 박지원의 이야기들이 밑도 끝도 없이 허망한 이유다.
엄숙하고 진지한 정조가 그의 문체를 두고 세상을 흐린다고 타박놓았던 이유였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