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세의 우락부락한 얼굴을 보면 조폭이 생각난다.
그런데 하는 짓은 많이 다르다.
한마디로 간지난다.
아침에 눈을 뜨자 마자, 컴터를 켰다.
밤사이에 진행된 북한과 브라질의 경기가 궁금했다.
경기결과를 확인하고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기사는 정대세의 눈물이다.
독립영화 상영관에 걸렸던 '우리학교'라는 영화가 있다.
민족의식과 관련된 서사에 앵글을 맞췄다.
일본의 조선인학교를 수년간에 걸쳐서 다큐멘타리 형식으로 찍었다.
일본의 조선인학교는 일종의 변방이다.
일본도 아니고, 남한도 아니고, 그렇다고 북한에도 속할 수 없는 경계 또는 변경이다.
일본,남한,북한이 아닌 조선이라는 명칭이 일본조선인학교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적시한다.
일본 제1지대, 남한 제2지대, 북한 제3지대다.
그렇다면 일본조선인학교는, 제4지대라고 해야한다.
이런 변방 아이들의 학교생활을 찍은 영화가 '우리학교'다.
그 영화에 정대세가 조선인학교의 축구부원으로 활동하는 내용이 있다.
조선인학교는 당연히 일본인 학교에 비해서 규모가 턱도 없이 작다.
물론 시설도 형편없는, 근근히 학생수를 채워서 폐교를 모면하는 학교다.
선생님들이 학생모집을 위해서 수백킬로까지 원정을 다닌다.
영화는 그런 재일 조선인들의 일상을 아주 느리고 담담하게 말한다.
모든 경계에는(변경에는) 꽃이 핀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주류 바깥의 그들에게서 자유라는 꽃이 핀다.
조선인학교는 일본이라는, 주류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아이들을 기른다.
우리로 치면, 입시의 구속으로 부터 자유롭다.
그게 아이들이 자유롭게 놀고, 뛰고, 뒹구는 활동이 풍성한 이유다.
조선인학교의 축구부도 그런 자유중의 하나다.
그들은 겨우겨우 11명의 축구부를 꾸리지만, 온힘을 다해서 연습하고 놀고 승부한다.
영화에는 그런 아이들이 이웃 일본인 학교와의 경기에서 패배하고, 그걸 애석해하는 장면들이 있다.
영화를 보면서 그게 참 놀라웠다.
아직 10대인 그들이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 열정을 다하는 모습이란게 너무 낮설었다.
운동장에 주저 앉아 패배를 통곡하는 모습이란게 너무 놀라웠다.
'저렇게 자유롭고 열정적으로 10대를 보낸 아이들은 얼마나 건강한 삶을 삶까!'
그게 부러웠다.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보여준 정대세의 눈물은 그 통곡을 정확하게 닮았다.
당시 그의 머릿속에는 소외된자의 과거 기억이 또 한편의 영화처럼 흘러갔을것이다.
그런 장면의 하나였던 정대세가 쏟은 눈물에 말들이 무성하다.
어떤 사람은 민족주의 코드로, 어떤 사람은 애국의 코드로 해석한다.
나는 다른 코드로 해석하고 싶다.
일본도 남한도 북한도 아닌 제4지대의 소외된 자들의 삶을 정대세는 대변한다.
해방후 남한을 택한 재일거류민도 아니고, 북한을 택한 조총련도 아니고, 일본에 귀화한 일본인도 아니다.
더 이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과거 속으로 사라진 나라, 조선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정대세는 그런 소외된자들의 삶을 살았다.
지구상에 조국이 존재하지 않는 무국적의 허공에 뜬 지난한 삶이 정대세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조선국적을 끝까지 주장하면서 현재의 모든 편익을 거부한 재일 조선인들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 지구상에는 너무나 많은 변방이 있다.
그 변방의 눈물을 정대세의 눈물로 읽고 싶다.
cf) 정대세의 눈물을 애국이나 민족주의 코드로 해석하는건 그의 지난한 소수자적 삶에 대한 모독이다. 북한이나 일본이나 한국이나 사람을 존중한다면 어디든 그곳을 사랑한다는 정대세의 인터뷰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정대세의 눈물을 순수하게 해석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은 월드컵이 실어나르는 지나친 애국주의적 열기를 식히는 일이다. 월드컵의 상업적 흥행배경인 애국주의적 코드를 통과한 정대세는 필연적으로 한민족의 우수성 또는 애국심이라는 맥락을 발생시킨다.
월드컵이 지금처럼 광기어린 애국심이나 민족의식 각성의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는 현실이 아주 불편하다. 그 보다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류애를 표현하는 축제로 소비되는게 축구라는 스포츠의 올바른 용법이다. 월드컵의 상업적 맥락인 국가주의를 벗어나야 월드컵을 인류애의 보편적 놀이로서 좀더 의미있고 즐겁게 볼 수 있다. 지금처럼 무조건적인 애국의 기표로 소비되는 월드컵 열기는 일정하게 파시즘적 광기의 흐름이다. 2002년 붉은 악마로 대변되는 그런 파시즘적 광기를 제어할만한 민주적 역량을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지 아직은 미심쩍다.
즐거운 잔치에 고추가루 뿌리는 것 같은 이런 시각을 불편해하는 많은 사람이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열기를 편하게 바라볼 수 없는것도 분명한 우리의 현실이다. 학연, 지연, 혈연으로 묶인 한국사회의 봉건성이 이런 무조건적인 애국주의와 결합하면 한국사회는 금방 파시즘적인 통제와 획일화된 사회로 전락할 수 있다. 이런 우려가 괜한 꼰대스런 기우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