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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의 이틀



구월의 이틀 - 류시화

소나무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구월이 있다 소나무 숲이
오솔길을 감추고 있는 곳 구름이 나무 한 그루를
감추고 있는 곳 그곳에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이 있다

그 구월의 하루를
나는 숲에서 보냈다 비와
높고 낮은 나무들 아래로 새와
저녁이 함께 내리고 나는 숲을 걸어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뭇잎사귀들은
비에 부풀고 어느 곳으로 구름은
구름과 어울려 흘러갔으며

그리고 또 비가 내렸다
숲을 걸어가면 며칠째 양치류는 자라고
둥근 눈을 한 저 새들은 무엇인가
이 길 끝에 또 다른 길이 있어 한 곳으로 모이고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모래의 강물들

멀리 손을 뻗어 나는
언덕 하나를 붙잡는다 언덕은
손 안에서 부서져
구름이 된다

구름 위에 비를 만드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있어 그 잎사귀를 흔들어
비를 내리고 높은 탑 위로 올라가 나는 멀리
돌들을 나르는 강물을 본다 그리고 그 너머 더 먼 곳에도
강이 있어 더욱 많은 돌들을 나르고 그 돌들이
밀려가 내 눈이 가닿지 않는 그 어디에서
한도시를 이루고 한 나라를 이룬다 해도

소나무숲과 길이 있는 그곳에
나의 구월이 있다
구월의 그 이틀이 지난 다음
그 나라에서 날아온 이상한 새들이 내
가슴에 둥지를 튼다고 해도 그 구월의 이틀 다음
새로운 태양이 빛나고 빙하시대와
짐승들이 춤추며 밀려온다 해도 나는
소나무숲이 감춘 그 오솔길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을 본다.(p.127-129)

장정일이 문학의 비의 또는 인생의 비의를 설명하기 위해서 소설에 차용한 류시화의 시다. 이야기의 템포가 아주 빠르고, 한국사회의 어떤 작가 보다 전위적인 장정일의 문제의식이 재미있다. 그래서 늙다리 아저씨의 감수성으로는 따라가는데 불편한 대목이 여러곳이다. 그럼에도 이 시만은 친숙하게 읽혔다.

인생은 젊은 날 어느 한순간인 구월의 이틀이 인생의 전부이고, 나머지는 그냥 죽지 못해 사는 아무런 의미없는 시간이다.는 메세진데 그렇게 생각하면 인생이란게 너무 허무하기도 하고 비극적이기도 하다. 나는 그런 구월의 빛나는 순간들이 매일매일이라고 거꾸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면 살아있는 매 순간이 구월의 이틀인가? 아마도 그건 삶을 살아내는 능력 또는 자세의 문제일 것이다.

cf) 소설에 등장하는 '은'이라는 캐릭터는 우리 소설에서는 흔치 않은 캐릭터다. 동성애자이고 무조건 강한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런 강함은 약자를 보호하는 엘리트적 책임감으로 무장한 순수한 도덕을 의미하는데, 그건 어떤 원한의 감정이나 질투의 감정에도 오염되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 장정일은 그런 강함을 추종하는 그리고 지속적인 자기개발의 덕성을 갖춘 '은'에게서 비로소 새로운 우익청년의 탄생을 그리려고 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 그런 '은'과 같은 청년 캐릭터가 존재하는지 또는 그런 개연성조차라도 있는지는 질문해 보고 싶다. 그런 토양조차라도 존재하는지 질문해 보고 싶다.
이런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그의 이 소설을 현실에서 어떤 맥락으로 해석해야 할지 최소한의 해석틀을 만들 수 있을것이다. 결론은 부질없는 질문이라는 것이다. 내 협소한 상상으로는 의미있는 생산적인 어떤 것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찌어찌 머리를 쥐어짜서 그런 질문에 성실한 대답을 추구해 보았자, 한국현실에서는 '은'과 같은 젊고 순수하고 자유로운 캐릭터를 유추할 수 없을 거라는 성급한 무의식적 판단 때문이다. 
물론 소설속 상상의 인물을 현실의 개연성에 곧바로 대입하는게 쓸모 없는 짓이기는 하지만, 구태여 현실에서 그런 가능성을 따지자면 쫌 늙었기는 하지만 문재인이나 김두관 또는 안철수 같은 친일의 죄악도 없고 박정희 파시즘체제에 오염되지도 않은 새로 뜨는 정치엘리트들에게서 좀더 생생한 살아있는 우익의 모습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