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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책, 산책, 버린책 - 장정일의 독서일기




장정일의 가장 생산적인 글 쓰기는 '독서일기'인 것 같다.
과문해서 잘 모르지만, 아마도 장정일이 '독서일기'라는 글 쓰기 양식을 이렇게 재미있고 풍성하게 만든 최초의 글쟁이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다시 김영민을 빌려서 장정일의 글 쓰기를 말하자면 이렇다.

장정일은 '독서일기'라는 글 쓰기 스타일을 만들었다.
이런 글 쓰기 스타일은 문학적으로 고급스런 글 쓰기 스타일로 간주되는 '소설'이나 '시'에 견주면 어줍잖은 글 쓰기 스타일이다.
그래서 이런 글 쓰기는 세속적으로 말하자면 쪽팔리는 글 쓰기다.
최초의 '독서일기'라는 글 쓰기 스타일 생산자는 이런 쪽팔림을 댓가로 지불하지 않을 수 없다.
엄격하고 고급스런 글 쓰기 양식 '시 또는 소설', 그것보다 저급한 글쓰기 '기타 잡문'으로 위계화된 현실에서, 기타잡문인 '독서일기'는 쪽팔림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
쪽팔림을 통과해서 장정일은 새로운 스타일을 얻었다.
이렇게 획득한 스타일이 세속의 추인을 받아 다른 사람들이 모방하기 시작하면 이제 스타일은 하나의 새로운 양식이 된다.
다른 말로하면, 장르라고 해야하나?
장정일의 '독서일기'라는 스타일이 양식(장르)이 되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양식처럼 보인다.
이런 '독서일기'라는 스타일로 책을 십여권 냈으면, 이게 양식으로 받아들여진게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시에서 시작해서 소설로 갔던 장정일이 '독서일기'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야 했던 저간의 사정은 무엇일까?

아마도 '네게 거짓말을 해봐'라는 소설의 필화사건을 빼 놓고 설명할 수 없을것이다.
수감생활의 상처 때문에 내면의 자기검열 습관이 생겼다고, 고백한 글을 어디선가 읽었다.
자기검열이 전혀 없는 인간이라는게 애초에 불가능하기는 하지만, 작가에게 의식되는 내부검열이란 그 사회의 지배체제가 작가의 내면에 설치한 감시장치이다.
자신 내부의 자기감시 장치를 의식하는 작가가 할 수 있는 글 쓰기란 무엇일까?
타인의 글을 빌리면 훨씬 말하기가 쉽지 않을까?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일종의 우회로 또는 샛길을 하나 만드는 것이다.

그런점에서 장정일의 '독서일기'라는 양식은 진짜로 쪽팔리는 한국사회의 한 단면이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더니 장정일은 치졸하고 쪽 팔리는 한국사회의 한 극단 경계에서 '새로운 스타일 - 독서일기'라는 꽃을 피웠다.
혼자 배배꼬인 시선일지 모르나, 그의 성공을 크게 축하하고 또한 감사하고 싶다.

'독서일기'라는 새로운 스타일은 어쨌든 대중교양의 양식으로도 뛰어나고, 개인의 치열한 자기극복의 수단으로서도 휼륭하다.
물론 '독서일기'라는 스타일이 이 세상에 기미조차도 없던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전혀 새로운 스타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걸 양식으로 까지 끌어 올린건 장정일의 덕이다.

왜 장정일이 시가 많이 읽히는 한국사회는 병적이라고 말하는지, 꼼꼼한 산문이 사회에 훨씬 필요한 일이라고 말하는지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