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obreeding : Heterobreeding
잡종교배가 우월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순종교배는 열성 유전인자를 강화해서 종의 소멸을 일으키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바이러스 같은 단순 생물체들이 종들간의 유전인자를 섞어서 새로운 종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어찌보면 생물체의 진정한 창조자가 단순한 이들 생명체인지도 모른다.
종들간에 유전인자를 뒤 섞는 행위를 통해서 생명체는 지속성을 확보한다.
만일 새로운 종들이 탄생하지 않는다면, 생명은 언젠가 소멸할 것이다.
잡종교배는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미국사회가 아직도 건강한 것은 끊임없이 잡종들이 유입되기 때문이다.
전혀 낮선 잡종들이 가져온 이질적 문화들이 미국사회의 새로운 갱신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걸 'melting pot(혼합용광로)'라는 말로 표현한다.
20세기 후반 일본에 무섭게 따라 잡히던 미국경제를 살려낸건, 인도인들의 IT인력이라는 말이 있다.
당장 미국을 집어 삼킬듯 위세를 떨치던 일본을 극복한 힘은 인도에서 유입된 인도의 고급 IT인력이라는 거다.
물론 이런 설명은 단편적이다.
그렇지만 또한 진실의 어느 한단면을 보여준다.
이번 미국 민주당 대선레이스를 지켜보면서 미국이 진짜로 역동적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힐러리와 오바마 모두 어찌 보면 미국 주류사회(WASP : White Anglo-Saxon Protestant )의 입장에서 보면 소수자들이다.
하나는 여성이고, 다른 하나는 흑인이다.
미국 리더쉽의 새로운 갱신이 발생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힐러리도 오바마도 미국주류 사회에 이질적 존재들이다.
개인적으로 그런 헤테로브리딩을 적극 지지한다.
그건 내 정치적 사회적 입장과도 일치한다.
현재 내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전공이 대학에서는 부전공이다.
호모브리딩의 한국 사회에서 나 같은 존재는 당연히 쪽을 내밀기 힘들다.
지역적으로도 나는 소수자적 존재다.
대학으로도 나는 소수자적 존재다.
라이프스타일이에서도 나는 소수자적 존재다.
이런 이질적 소수자성이 나를 차이나고 풍부하게 했다는게 내 주장이다.
예를 들어 내 전공에서 확실히 나는 다른 영어전공자들 보다 풍부한 인문학적 자연과학적 소양을 가지고 있다.
영어 자체를 사회적 맥락에서 해석할 줄 안다.
영어학습을 사회적 인문적 관점에서 다룰줄 안다.
고등학교시절 이과 전공이었고, 대학도 잠깐이기는 하지만, 이과와 문과를 오갔다.
대학원 시절에는 타 전공자들의 공부를 기웃거리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제일 재미있고 유익해던것은 대학원 학생회에서 주최하는 전공을 넘나드는 학제간 세미나였다.
만일 내가 호모브리딩의 입장에 있었더라면 그런 다양함과 풍부함을 갖추지 못했을거다.
내 이질적이고 다양한 배경이 내 교과에 대한 독특한 시각을 갖게 했을거다.
호모브리딩의 이점을 취하는 조건의 불리한 입장 때문에 내가 헤테로브리딩적인 삶을 산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학연으로도 지연으로도 혈연으로도 호모브리딩의 흐름을 쫒으면서 거기서 세속적 이익을 취할 수 있는 기회가 풍부하게 있었다.
내가 가진 소수자성 못지 않게 다수적 주류성도 많은 삶을 살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류적 흐름을 따라잡으려 안달한 시절이 내 인생의 절반이라고 해야할거다.
하지만 항상 그게 불편했다.
뭔가 무임승차한다는 느낌이 있었다.
뭔가 정당하지 못한 패거리를 만든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 흐름들에 몸을 실었다가는 항상 되돌아 나오곤 했다.
호모브리딩적인 사회는 단순하게 말해서 정실사회다.
혈연 지연 학연으로 묶이는 동일한 유전자 결합을 상상해 보라.
계속되는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이게 무슨 창의적 다양성이 있겠는가?
지금까지 한국사회는 동일성으로 묶인 효율성으로 생존해 왔다.
이게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
한국에 들어온 이주민 노동자들은 귀중한 존재이다.
한국사회의 노후한 구태의연함을 새롭게 할 활력이다.
정실사회가 만들어 낸 지속적인 동일 유전자 결합을 극복할 새로운 문화적 동력이다.
이들 이질적 존재가 없다면 한국 사회의 문화적 다양성을 어디서 찿을 것인가?
농촌의 읍내에 나가면 동아시아에서 온 많은 아줌마들을 쾌 흔하게 마주친다.
실제 농촌 노동력의 많은 부분을 이들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모습일거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단지 노동력 착취의 수단으로서만 보는것 같다.
이들을 그 이상의 존재로 대접해야하지 않을까?
이들이 한국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하는게 전부여서는 안될거다.
오히려 한국 사회가 이들이 어떻게 다른 존재인지 생각하고 연구해야한다.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고, 이질적 문화가 함께 공존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그게 서로를 위하는 길이다.
헤테로브리딩이 거기서 탄생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변화는 변방에서 시작된다.
결국 중심은 변방에서 부터 무너진다.
그런 의미에서 동아시아의 소수 이주민 노동자들은 혁명적 존재들이다.
cf) 처음 글을 쓸때는 한국대학사회의 호모브리딩적 성격을 지적하고 싶었다.
학부와 대학원이 동일해야 하고, 학부와 대학의 전공이 동일해야 한국사회에서는 성공한다.
반대로 미국 대학에서는 호모브리딩을 철저히 배격한다.
예를 들어 하버드대학과 하버드대학원 경력은 쥐약이다.
전공도 동일 전공은 경쟁력이 없다.
다양한 전공경력이 더욱 소중하게 대접 받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호모브리딩이 동일한 사유만 반복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한국 사회의 천박성이 많은 부분 호모브리딩에 기인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조직이나 동일성에 기반한 정실적 행태가 상식이 되다시피 했다.
이런 행태의 패해가 가장 심한곳이 대학사회라고 생각한다.
대학사회는 서울대 미국유학으로 완전히 평정되다시피 된게 현실이다.
다른 이질적 경력들은 바늘하나 꽂을 곳이 없는 현실이 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이너써클들 한마디로 말하면 서울-연-고대학 미국유학의 '어륀지'라는 동일종이기 때문이다.
98%의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 단어가 이들에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륀지'라는 동일성을 확증해주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이들 '어륀지'2%가 '오렌지' '아렌지' '귤' '낑깡' '한라봉'등 나머지 98%를 지배하는 현실을 바꿀 동력이 어디에 있을까?
어륀지가 못 되어 안달하는 현실과 날마다 부딪힌다.
그게 좀 피곤하다.
어륀지 보다 한라봉이 훨씬 맛있다.
날마다 술먹었더니 말이 이리저리 왔다리 갔다리 한다.
또 술먹으로 가야겠다.
잡종교배가 우월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순종교배는 열성 유전인자를 강화해서 종의 소멸을 일으키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바이러스 같은 단순 생물체들이 종들간의 유전인자를 섞어서 새로운 종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어찌보면 생물체의 진정한 창조자가 단순한 이들 생명체인지도 모른다.
종들간에 유전인자를 뒤 섞는 행위를 통해서 생명체는 지속성을 확보한다.
만일 새로운 종들이 탄생하지 않는다면, 생명은 언젠가 소멸할 것이다.
잡종교배는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미국사회가 아직도 건강한 것은 끊임없이 잡종들이 유입되기 때문이다.
전혀 낮선 잡종들이 가져온 이질적 문화들이 미국사회의 새로운 갱신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걸 'melting pot(혼합용광로)'라는 말로 표현한다.
20세기 후반 일본에 무섭게 따라 잡히던 미국경제를 살려낸건, 인도인들의 IT인력이라는 말이 있다.
당장 미국을 집어 삼킬듯 위세를 떨치던 일본을 극복한 힘은 인도에서 유입된 인도의 고급 IT인력이라는 거다.
물론 이런 설명은 단편적이다.
그렇지만 또한 진실의 어느 한단면을 보여준다.
이번 미국 민주당 대선레이스를 지켜보면서 미국이 진짜로 역동적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힐러리와 오바마 모두 어찌 보면 미국 주류사회(WASP : White Anglo-Saxon Protestant )의 입장에서 보면 소수자들이다.
하나는 여성이고, 다른 하나는 흑인이다.
미국 리더쉽의 새로운 갱신이 발생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힐러리도 오바마도 미국주류 사회에 이질적 존재들이다.
개인적으로 그런 헤테로브리딩을 적극 지지한다.
그건 내 정치적 사회적 입장과도 일치한다.
현재 내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전공이 대학에서는 부전공이다.
호모브리딩의 한국 사회에서 나 같은 존재는 당연히 쪽을 내밀기 힘들다.
지역적으로도 나는 소수자적 존재다.
대학으로도 나는 소수자적 존재다.
라이프스타일이에서도 나는 소수자적 존재다.
이런 이질적 소수자성이 나를 차이나고 풍부하게 했다는게 내 주장이다.
예를 들어 내 전공에서 확실히 나는 다른 영어전공자들 보다 풍부한 인문학적 자연과학적 소양을 가지고 있다.
영어 자체를 사회적 맥락에서 해석할 줄 안다.
영어학습을 사회적 인문적 관점에서 다룰줄 안다.
고등학교시절 이과 전공이었고, 대학도 잠깐이기는 하지만, 이과와 문과를 오갔다.
대학원 시절에는 타 전공자들의 공부를 기웃거리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제일 재미있고 유익해던것은 대학원 학생회에서 주최하는 전공을 넘나드는 학제간 세미나였다.
만일 내가 호모브리딩의 입장에 있었더라면 그런 다양함과 풍부함을 갖추지 못했을거다.
내 이질적이고 다양한 배경이 내 교과에 대한 독특한 시각을 갖게 했을거다.
호모브리딩의 이점을 취하는 조건의 불리한 입장 때문에 내가 헤테로브리딩적인 삶을 산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학연으로도 지연으로도 혈연으로도 호모브리딩의 흐름을 쫒으면서 거기서 세속적 이익을 취할 수 있는 기회가 풍부하게 있었다.
내가 가진 소수자성 못지 않게 다수적 주류성도 많은 삶을 살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류적 흐름을 따라잡으려 안달한 시절이 내 인생의 절반이라고 해야할거다.
하지만 항상 그게 불편했다.
뭔가 무임승차한다는 느낌이 있었다.
뭔가 정당하지 못한 패거리를 만든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 흐름들에 몸을 실었다가는 항상 되돌아 나오곤 했다.
호모브리딩적인 사회는 단순하게 말해서 정실사회다.
혈연 지연 학연으로 묶이는 동일한 유전자 결합을 상상해 보라.
계속되는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이게 무슨 창의적 다양성이 있겠는가?
지금까지 한국사회는 동일성으로 묶인 효율성으로 생존해 왔다.
이게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
한국에 들어온 이주민 노동자들은 귀중한 존재이다.
한국사회의 노후한 구태의연함을 새롭게 할 활력이다.
정실사회가 만들어 낸 지속적인 동일 유전자 결합을 극복할 새로운 문화적 동력이다.
이들 이질적 존재가 없다면 한국 사회의 문화적 다양성을 어디서 찿을 것인가?
농촌의 읍내에 나가면 동아시아에서 온 많은 아줌마들을 쾌 흔하게 마주친다.
실제 농촌 노동력의 많은 부분을 이들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모습일거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단지 노동력 착취의 수단으로서만 보는것 같다.
이들을 그 이상의 존재로 대접해야하지 않을까?
이들이 한국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하는게 전부여서는 안될거다.
오히려 한국 사회가 이들이 어떻게 다른 존재인지 생각하고 연구해야한다.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고, 이질적 문화가 함께 공존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그게 서로를 위하는 길이다.
헤테로브리딩이 거기서 탄생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변화는 변방에서 시작된다.
결국 중심은 변방에서 부터 무너진다.
그런 의미에서 동아시아의 소수 이주민 노동자들은 혁명적 존재들이다.
cf) 처음 글을 쓸때는 한국대학사회의 호모브리딩적 성격을 지적하고 싶었다.
학부와 대학원이 동일해야 하고, 학부와 대학의 전공이 동일해야 한국사회에서는 성공한다.
반대로 미국 대학에서는 호모브리딩을 철저히 배격한다.
예를 들어 하버드대학과 하버드대학원 경력은 쥐약이다.
전공도 동일 전공은 경쟁력이 없다.
다양한 전공경력이 더욱 소중하게 대접 받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호모브리딩이 동일한 사유만 반복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한국 사회의 천박성이 많은 부분 호모브리딩에 기인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조직이나 동일성에 기반한 정실적 행태가 상식이 되다시피 했다.
이런 행태의 패해가 가장 심한곳이 대학사회라고 생각한다.
대학사회는 서울대 미국유학으로 완전히 평정되다시피 된게 현실이다.
다른 이질적 경력들은 바늘하나 꽂을 곳이 없는 현실이 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이너써클들 한마디로 말하면 서울-연-고대학 미국유학의 '어륀지'라는 동일종이기 때문이다.
98%의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 단어가 이들에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륀지'라는 동일성을 확증해주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이들 '어륀지'2%가 '오렌지' '아렌지' '귤' '낑깡' '한라봉'등 나머지 98%를 지배하는 현실을 바꿀 동력이 어디에 있을까?
어륀지가 못 되어 안달하는 현실과 날마다 부딪힌다.
그게 좀 피곤하다.
어륀지 보다 한라봉이 훨씬 맛있다.
날마다 술먹었더니 말이 이리저리 왔다리 갔다리 한다.
또 술먹으로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