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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경치

전자적 글 쓰기

 

<  2013. 06. 19. 해남 고천암호 가는 길 섶 >

 

지남 봄 자전거로 고천암호 주변길을 배회하다가 딸기 무데기를 만나곤 했다.

길을 멈추고 무데기를 들추면 금새 한웅큼 씩의 딸기가 손에 잡혔다.

그걸 한잎에 털어 넣고 우적 베어물면, 그 안에 상큼한봄이 아득한추억이 그리고 달콤한햇살이 목울대를 타고 넘어갔다. 

<2013.08.29. 해남 백야리에 있는 페교된 초등학교 - 해남 영어타운 운동장>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가 모퉁이에 운동장이 하나 있다.

해남에 머무는 날, 해질녁 집에 오는 길에 이곳에서 운동을 한다.

여기는 평소에도 고즈넉 하고, 저녁 시간이면 적막하다.

텅빈 운동장에서 혼자 노는게 무슨 재미가 있으랴 싶겠지만, 그것도 사람의 일이라 익숙해지면 거르기 힘들다.

거르고 싶지 않을 만큼 재미있다.

해가 쨍쨍한 여름 뒤 끝에 흠뻑 땀을 흘리고, 운동장 귀퉁이로 해지는 모습을 바라본다.

햇빛이 눈에 보인다.

여름의 낮 동안에는 세상이 온통 햇빛으로 가득한데, 뉘엇 해질 무렵이면 어두운 밤 그림자가 햇빛을 조금씩 물리는 모습이 보인다.

'밤과낮'이라는 궁정 수문병들의 엄숙하고 정연한 교대식 처럼.

그게 마치 빛의 색깔 번짐 처럼 보인다.

정작 빛의 천지 낮에는 볼 수 없는, 스러질 때에만 보이는 빛의 색깔.

몰려가는 그리고 사라지는 풍경이 아름답다.

이 처럼 인간은 가득했던 그 무엇이 사라지면서, 그 때에야 비로소 그 풍경을 인지한다.

인간들의 일상적 체계의 풍경은 그걸 떠 받치는 존재가 소멸하면서 겨우 그 풍경의 진실을 드러낸다.

풍경을 지탱하던 뻔한 사실들은 그것이 사라져야 나타난다.

그러므로 세속의 풍경은 눈을 감아야 더 잘 보인다.

눈을 부릎뜨고는 진실을 마주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바보라는 건 그래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대기에 가득한 공기가 증발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숨막히게 알리는 것 처럼, 가부장제의 안녕은 그리고 가정이라고 불리는 모든 공동체의 평화는, 안녕과 평화라는 너무도 익숙한 풍경을 지탱해 주던 여성적 노동이 사라지는 순간에서야 간신히, 그 안녕과 평화를 지탱해 주던 것이 댓가 없이 착취된 여성적 노동이었다는 숨어있던 풍경을 폭로한다.

뒤 늦은 후회의 꼴을 뒤에 달고서.

그래서 인간의 어리석음은 영원하다.

 

cf1) 핸드폰에 달려있는 카메라를 사용하면서, '매체가 메세지다'라는 맥루한 식의 해석이 피부에 닿는다.

'뜻기호-음기호-전자적기호' 순차로 글 쓰기가 해체된다는 말이 이해된다.

최근에 내가 쓰는 글들은 전자적 기계 없이는 불가능하다.

글 쓰는 행위만이 아니라, 글의 소재 선택 부터, 글의 내용에 이르기 까지 겹겹이 전자기계들이 개입되어 있다.

아마도 핸드폰 카메라가 없었다면, 위에서 처럼 봄-여름에 걸친 일상적 시간의 한 부분을 동시에 제시할 생각 자체를 안했을 것이다.

그러니 나의 쓰기는 기계-매체로 부터 시작되었고, 기계-매체에 의존해서 쓰고 있고, 기계-매체에 대해서 쓴다.

 

cf2) 김영민의 말 : 글쓰기의 역사는 간단하다 ; 신이 글을 쓰던 과거에서 기계가 글을 쓰는 미래로 흘러가는 것, 그것이 우리 역사의 전부이며, 그 거대한 한 순차인 것이다.

기계적 글쓰기는 그 총체성에서 이미 형이상학을 품는다. 인류의 마지막 형이상학은 기계 그 자체가 형이상학의 형식이자 내용인 형이상학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글은 내내 신들이 쓰는 셈이다. 우리들은 마지막 신이 글을 쓰기 시작하는 시점의 문턱에서 살고 있다. 완벽한 무신의 총체로 이루어진 새로운 기계-신의 글쓰기.(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 p.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