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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경치

도덕과 윤리

 

< 가을이 완연한 하늘이다. 개인적으로 봄 여름에는 붕붕 날아다니고, 가을 겨울에는 우울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쫌 우울해질려하고, 머릿속에 맴도는 주제들도 대체로 그런것들이다. 고치기 힘든 병인 형이상학이 다시 돌아왔다. 아마도 고질이겠지! >

 

도덕과 윤리

자연과학에서는 어떤 특정한 용어에 대한 개념정의가 명확하다.

이에 비해서 사회과학-인문학 일반에서는 어떤 특정한 용어에 대한 개념정의가 천차만별이다.

사회-인문의 용어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것은 세상의 본질에 대한 반영일 것이다.

이런 혼란이 오죽 성가셨으면, 비트겐슈타인이 모든 철학용어를 수학적 언어로 치환해보자는 망상을 꿈꾸었을까?

그럼에도 어떤 특정한 용어에 대한 상식적 수준에서의 개념정의가 존재하는데, 그건 사회적 힘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제도적-물리적으로 우월한 사회적 힘이 용어에 대한 개념정의를 결정한다.

그걸 기반으로 혼란스러운 세속에서 간신히 사람들은 의소통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개념정의의 출현은 새로운 사회적 변화의 징조다.

개인적으로 주목하고 있는 그런 용어의 하나가 도덕과 윤리를 구분해서 사용하려는 사람들의 출현이다.

상식적 수준에서 도덕과 윤리는 서로 겹치는, 의미가 같은 용어다.

근데, 도덕과 윤리라는 용어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말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고있다.

이들이 보기에 도덕은 주류계급의 지배이데올로기고, 윤리는 주류적 가치로 부터 자유로운 삶의 능동성을 높이는 생활양식이다.

거칠게 말해서 도덕은 억압이고 윤리는 해방이라는 분위기가 다분한 해석이다.

도덕에 대한 비판은 니체의 기독교 도덕론에 대한 비판에 젖줄을 대고 있고, 대안적인 윤리적 생활이란 스피노자의 '에티카(윤리학)'에서 그 기반을 닦았을 것이다.

니체와 스피노자에 대해서 제대로 된 책 한권 변변히 읽지 못했지만, 대체로 그렇게 되어있지 않나,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장황하게 도덕과 윤리에 대해서 뭐라고 씨부린건 학생지도를 하면서 새로운 언어의 사용이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내게 새로운 그건, 어떤 사안에 대해서 상식적 수준의 도덕을 잣대로 학생들을 훈계하지 말라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옳다-그르다,와 같은 언어을 폐기하라.

대신에 그런 행동은 멋지다 - 멋지지 않다.와 같은 도덕적 판단과 거리를 둔 또래집단 준거 시선 언어를 사용하라는 권고다.

더욱이 또래 집단 내부로 부터의 존중을 최고 상위 가치로 설정하는 청소년기는 도덕적 금지선을 두면 오히려 위반의 유혹을 강하게 느낀다.

주류 지배집단 어른들의 강한 도덕적 금지선은, 오히려 위반으로 얻는 또래 집단의 존경이라는 파이를 키우기 때문에, 도덕적 금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걸 위반할려는 유혹도 상대적으로 강해 진다.

강한 도덕적 판단에 근거한 금지는 그걸 위반하라는 호객행위나 다름없다.

따라서 도덕적인 언어가 아니라 윤리적 언어, 또는 또래집단의 준거 시선 언어가 효과적이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친구들이 보기에 그런 행동은 세련된 남자답게 보일거다, 아니면 남자들에게 그런 행동은 예뻐 보일거다.와 같은 표현이 될 것이다.

나는 이런 주장들을 대하면서 학생지도에 대한 '윤리적' 방법이라는 상상을 했다.

학생지도의 '도덕적' 방법을 대체하는 새로운 방식일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찜찜하게 남는 부분은 '멋지다' '또래집단 준거 시선' 등등 이라는 언어가 성별로 스테레오 타입화된 성별 특성을 강화하는 기제로 작용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이다.

하기야, 세상에 완전무결한 해결책이라는게 어디에 있을까?

'여성성-남성성'이라는 분명하게 갈리는 성적 특성 중 어느것은 '좋고-나쁘고'의 판단에 자신없는 지금, 나는 학생지도에 있어서 도덕적 훈계 보다는 '윤리적 방법론(이런 말이 가능한가?)'이 더 먹힌다면 그걸 택하고 싶다.

이런게 답답한 현실을 잠시만이라도 버티게 해 줄 임시변통의 힘이라도 될까?

cf) '저자가 거울 뒤로 사라져야 하는 까닭'이라는 말이 있다. 내 방식대로 말 하자면, 글 쓴이가 글 속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말이다. 나에게는 이게 정말 어렵다. 자세히 후독해 보면, 내가 쓰는 모든 글들 속에 내 자신의 속이 훤히 다 보인다. 얼굴이 뜨뜻해지는 경우들이 다 반사다. 내 재주로는 아무리 해도 거울 뒤로 숨을 수가 없다. 아마도 죽을 때 까지 그런 지경에는 도달하지 못 할 것이다. 그럼에도 뻔뻔하게 이렇게 부끄러움을 무릎쓰는건, 객관화에 대한 욕망 때문이다. 쓰는 과정에서 문제가 객관화 되고, 그러면 어쨌든 그 문제를 거리감을 두고 관찰할 수 있다. 해결책이 나오고 안나오고는 추후의 문제다. 문제적 질문에 대한 객관화만으로도 일단은 현실을 버티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