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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경치

이별


이제 편안히 쉬십시오.

내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은 술먹고 놀기다.
얼마전 서너살 선배의 부음을 전해 듣고 문상을 갔다.

가면서, 사람들 만나서 술먹고 놀판이 생겼군.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했다기 보다 아마 내 몸의 세포들이 그런 반응을 보였다는게 맞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슬픔은 희박했고, 술자리를 기대하는 마음은 풍족했다.
그러니 내 몸이 그렇게 반응했달 수 밖에 없다.

막상, 그 시간은 그저 밍밍했다.
술판의 재미는 도망갔고, 애도와 추모의 슬픔은 너무 덤덤했다.
단지 하릴없이, 추레하게 늙어버린 오래된 지인들을 보는 일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늙어 희끗하고, 낡아서 비루먹은 모양들만 넘쳐났다.

애도는 벌써 버릇이 되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지만, 그건 단지 버릇 그 이상은 아니었다.
모르는새, 애도의 버릇이 몸에 새겨진 무뉘가 되어 있었다.

돌아오면서, 괜한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후회했다.
쓸데있는 짓만 하고 살수는 없겠지만, 그 시간에 좀더 생산적인 일을 할 수도 있었는데,라는 야박한 생각이 들었다.
이런 야박함은 어디서 왔을까?

몇년전, 비즈니스처럼 느껴지는 일체의 인사치례를 단칼에 잘랐다.
원래 그런걸 챙기는 일에 게으르기도하고, 그런걸 챙기면서 이게 무슨 미친짓인가?라는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몸이 새로운 상황에 배치되면서 최소한의 것만 남겨두고 그걸 모두 잘랐다.
최소한의 것이란 몸이 저절로 움직여지는 그런 자리였다.

근데 이게 문제가 발생했다.
내 몸을 담았던 그 전의 세계를 복구하면서, 옛날의 구태하고 낡은 버릇이 다시 되돌아왔다.
사람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고 노는데 온 에너지를 탕진하던 그 시절이 되돌아 왔다.
마음이 가는 최소한의 범위가 점점 넓어져서, 그 동심원이 옛날의 동심원으로 커지고 있다.
야박하게 말해서, 그게 최근의 내 모습이다.
그리고 그날 그 자리의 나를 설명한다.

습관의 귀환!
돌아 오지 않는건 습관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위안이 되는건, 습관이 귀환했단걸 자각하는 새로운 버릇이다.
그 새로운 버릇이 그나마 갱신된 새로운 몸 이다.

그나저나, 젊은 시절 그렇게 뜨겁고 당당했던 청년이 나이 들어 세상에서 사라졌다.
확실히, 곡절이 쌓여 무진장 세월이 흘렀다.
거기 옹송거리고 있던 모두에게 그런 흔적들이 역력했다.
다들, 한 세월 살아 내느라 고생했던 자국 같은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게 조금은 슬프기도하고, 조금은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그만큼 살았으면 됐다고 위로하고도 싶었고, 아직도 멀었다고 타박 놓고도 싶었다.

자리를 털고 먼저 일어난, 그에게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몇일 지나니 마음이 바뀐다.
이제 고만 편안히 잠드시라.
그 만큼 치열했으면, 차고도 남는 인생을 살아냈다.
타박은 남은 자들이 떠 안을 일이다.



출처 : http://vonnegut.egloos.com/page/3 (소설가 김중혁의 블로그)

cf) 같은 지역에서 같은 시기에 해직됐던 동료중 처음으로 그가 세상을 등졌다.
그게 조금은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남는다.
모든게 처음이기는 하지만, 이것도 처음이라.
어떻게 애도해야하는지 막막하다.
몇일전 우연히 발견한 맑은 하늘이 이 글을 쓰면서 그의 이미지와 겹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