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은 바르게 살야야한다는 것에 대한 강박증 비슷한게 있다.
거리도 깨끗하고, 모든게 반듯반듯하다.
'하이'라는 대답은 거의 언제나 군인수준으로 절도있다.
국가의 명령에 철저하게 묶인 일본인이라는 무의식적 감각을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우연히 마주친 그 많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본인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묘한 판단을 피하기 어렵다.
나와 마크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게 우리만의 별쭝난 감수성일까?
그에 비해서 한국 거리는 일본 보다 훨씬 더럽다.
풍경들이 엉망진창으로 널부러진게 역력하다.
그럼에도 한국사람들의 표정이 훨씬 자유롭고 편하다.
그건 일본보다 국가나 체계로부터 구속당하지 않는 자유의 영역, 훨씬 넓은 사적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근대성은 천황을 중심으로한 위로 부터의 강제적 수행으로 성취되었다.
천황을 죽이지 못하고, 하이하이 하면서 이룩한 근대성이란 개인적 주체성이 결락한 노예의 근대성일 것이다.
그에 비해서 한국의 근대성은 중심의 구심력이 없는, 구시대의 봉건적 중심에서 이탈하려는 큰 원심력이 있다.
그게 일본 보다 자유롭고, 역동적인 개인들을 산출하는 힘으로 작용했을 거다.
정부를 전복하고, 체계를 뒤 엎으려는 원심력의 힘들이 한국의 근대성이 일본 보다 그래도 희망적인 측면이다.
한국사회는 그런 원심력을 학연-혈연-지연으로 관리한다.
정실에 근거한 이런 사적인 전근대적 봉건성이 허약한 공적 구심력의 빈 중심을 채운다.
사적인 원심력을 다른 사적인 정실관계로 구심력을 삼아서 균형을 유지하는 셈이다.
내가 근무했던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공적인 논의 내용을 동문회 종류의 사적 모임에서 미리결정한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런 모임에는 친소관계가 중요하고, 술로 모든 차이들을 무마하면서 어떤 결정을 이끌어낸다.
그걸 공적인 학교단위에서는 집행회의 수준에서 논의하고 그대로 집행한다.
한국사회는 사적인 정실관계가 체계의 공적인 구심력 보다 훨씬 강력한 사회다.
부정적 측면에서 보자면, 이게 한국사회의 합리성을 떨어 뜨리는 가장 큰 요인이다.
결과로, 한국사회의 성원들은 공적인 구심력이 개인의 생활공간을 강력하게 규제하는 일본 보다는 훨씬 체계로 부터 자유로워 보인다.
과도하게 발달한 공적영역과 협소한 사적 영역, 이게 일본 사회의 한 특징이다.
이에 비해서 한국사회는, 구심력으로서 공적영역의 허약함과, 학연-혈연-지연에 근거한 사적인 관계의 비대함이 그 특징이다.
한국사회는 이런 사적 영역을 공정한 경쟁의 규칙으로 흡수하면서, 공적영역을 강화하는게 필요하다.
그렇다고 그게 역동적 개인의 사적 영역이라는 원심력을 압도하는 일본을 지향하는 일은 아닐것이다.
공적체계의 민주적 논의 형식을 강화하는 방향이라면 원심력으로서 사적 자유의 풍성함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공적체계의 민주성을 구심력으로 사적인 정실사회의 봉건적 구심력을 대체한다면, 사회적 합리성제고와 자유로운 사적 개인이라는 개와 고양이를 함께 기를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같은 동네가 그런데가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공적합리성을 제고한다고, 개인의 사적 영역을 말살하는 행위는 아이를 목욕물과 함께 버리는 우매함일 것이다.
한국사회가 그런 우매함의 함정을 피해가는 현명함이 있을까?
일본이 개인의 사적 자유의 영역을 조금씩이나마 넓혀가고, 한국은 개인을 체계에 완전히 흡수해 버리지 않을까?라는 비관적 전망도 있다.
다혈질적인 한국인의 기질이 그걸 쉽게 허용하지는 않겠지만.
거리도 깨끗하고, 모든게 반듯반듯하다.
'하이'라는 대답은 거의 언제나 군인수준으로 절도있다.
국가의 명령에 철저하게 묶인 일본인이라는 무의식적 감각을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우연히 마주친 그 많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본인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묘한 판단을 피하기 어렵다.
나와 마크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게 우리만의 별쭝난 감수성일까?
그에 비해서 한국 거리는 일본 보다 훨씬 더럽다.
풍경들이 엉망진창으로 널부러진게 역력하다.
그럼에도 한국사람들의 표정이 훨씬 자유롭고 편하다.
그건 일본보다 국가나 체계로부터 구속당하지 않는 자유의 영역, 훨씬 넓은 사적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근대성은 천황을 중심으로한 위로 부터의 강제적 수행으로 성취되었다.
천황을 죽이지 못하고, 하이하이 하면서 이룩한 근대성이란 개인적 주체성이 결락한 노예의 근대성일 것이다.
그에 비해서 한국의 근대성은 중심의 구심력이 없는, 구시대의 봉건적 중심에서 이탈하려는 큰 원심력이 있다.
그게 일본 보다 자유롭고, 역동적인 개인들을 산출하는 힘으로 작용했을 거다.
정부를 전복하고, 체계를 뒤 엎으려는 원심력의 힘들이 한국의 근대성이 일본 보다 그래도 희망적인 측면이다.
한국사회는 그런 원심력을 학연-혈연-지연으로 관리한다.
정실에 근거한 이런 사적인 전근대적 봉건성이 허약한 공적 구심력의 빈 중심을 채운다.
사적인 원심력을 다른 사적인 정실관계로 구심력을 삼아서 균형을 유지하는 셈이다.
내가 근무했던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공적인 논의 내용을 동문회 종류의 사적 모임에서 미리결정한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런 모임에는 친소관계가 중요하고, 술로 모든 차이들을 무마하면서 어떤 결정을 이끌어낸다.
그걸 공적인 학교단위에서는 집행회의 수준에서 논의하고 그대로 집행한다.
한국사회는 사적인 정실관계가 체계의 공적인 구심력 보다 훨씬 강력한 사회다.
부정적 측면에서 보자면, 이게 한국사회의 합리성을 떨어 뜨리는 가장 큰 요인이다.
결과로, 한국사회의 성원들은 공적인 구심력이 개인의 생활공간을 강력하게 규제하는 일본 보다는 훨씬 체계로 부터 자유로워 보인다.
과도하게 발달한 공적영역과 협소한 사적 영역, 이게 일본 사회의 한 특징이다.
이에 비해서 한국사회는, 구심력으로서 공적영역의 허약함과, 학연-혈연-지연에 근거한 사적인 관계의 비대함이 그 특징이다.
한국사회는 이런 사적 영역을 공정한 경쟁의 규칙으로 흡수하면서, 공적영역을 강화하는게 필요하다.
그렇다고 그게 역동적 개인의 사적 영역이라는 원심력을 압도하는 일본을 지향하는 일은 아닐것이다.
공적체계의 민주적 논의 형식을 강화하는 방향이라면 원심력으로서 사적 자유의 풍성함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공적체계의 민주성을 구심력으로 사적인 정실사회의 봉건적 구심력을 대체한다면, 사회적 합리성제고와 자유로운 사적 개인이라는 개와 고양이를 함께 기를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같은 동네가 그런데가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공적합리성을 제고한다고, 개인의 사적 영역을 말살하는 행위는 아이를 목욕물과 함께 버리는 우매함일 것이다.
한국사회가 그런 우매함의 함정을 피해가는 현명함이 있을까?
일본이 개인의 사적 자유의 영역을 조금씩이나마 넓혀가고, 한국은 개인을 체계에 완전히 흡수해 버리지 않을까?라는 비관적 전망도 있다.
다혈질적인 한국인의 기질이 그걸 쉽게 허용하지는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