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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경치

쌈질과 아나키즘


어려서부터 곧잘 현실에 맞서곤 했다.

초딩 때 바로 위 동네 형에게 대들었다가 죽도록 맞았다.
그 다음, 맨날 그 형네집에 가서 싸우자고 졸랐다.
그 때 '찐드기'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후로도 학교 일진이라고 소문난 놈들과는 어떤 형태로든 한번씩 붙었다.
붙어보면 대개 그놈이 그놈이었다.
지도 떨고 있고, 나도 떨었다.
선빵을 누가 먼저 날릴 기회를 잡느냐가 언제나 승패의 관건이었다.
기회는 대부분 용기의 문제였다.

선빵을 날리는 기회란, 싸움으로 발생하는 모든 부담을 감수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결국, 선빵이란 피곤한 현실을 감수하겠다는 선택이다.

고딩때 최고 일진을 학교 뒤란으로 불러냈다.
보자마자 연타를 휘둘렀다.
대빵이 얻어 터진건, 현실질서가 흩트러진 사건이었다.
한참지난 소풍날 한적한 하교길에서, 그 조무래기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

그것 말고도, 자잘한 쌈질은 많다.
때로는 얻어 터지기도 하고, 때로는 일방적으로 선빵을 날리고 끝난 경우도 있다.
그걸 하나하나 잘라서 승률 통계를 내면, 아마도 반분의 수치가 나올것이다.
물론, 선빵과 그게 불러온 쌈질을 한쌈으로 묶으면 그 비율이 포탄 맞은 비행기 마냥 처박힐 것이다.

말이 자꾸 엉뚱한 방향으로 번진다.

당연하겠지만, 어른이 되고난 다음 더 이상 물리적인 쌈질은 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권력투쟁 비슷한 쌈질을 하게 되었다.

이게 학교 시절의 쌈질을 닮았다.
항상 선빵을 날리고, 결국 장기적인 현실에서는 패배한다.

권력 투쟁에서 선빵이란, 어떤 명분이다.
명분을 내-세우는 일에는 능숙하다.
그걸 현실로 만들어 내-놓아야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

오늘, 프레시안에서 이계삼의 서평 '아나키즘, 네가 고생이 많다'를 읽었다.
그건, 아나키즘에 기초한 '진보교육 의제'의 옹색한 처지를 선연하게 말하고 있었다.
꼭, 어린시절의 내 쌈질을 닮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내 기질적 성향은 아나키즘에 가깝다.
그게 현실과 너무 쉽게 부딪힌다.
짜릿한 승리와 성취감의 순간들이 있기도하다.
그러다가, 뒤돌아보면 그게 어느새 현실에서 물거품이 되어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내가 대견스럽다.
남은건, 끈질긴 찐드기 밖에 없다.
그래도 언젠가는 내가 이길것이다.

결국, 나르시즘으로 돌아왔다.
나르시즘을 빼 버리면, 나에게 남는것이 무엇일까?  

프레시안 이계삼의 글 :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009301649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