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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워홀 그리고 라면 김연아 국가대표

1. 앤디워홀이 찬미한 현실

앤디 워홀의 말

이 나라 미국의 가장 위대한 점은 부자인 소비자도 가장 가난한 사람과 똑 같이 산다는 것이다. 당신은 텔레비전을 시청할 때 코카콜라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대통령도 코카콜라를 마시며, 리즈 테일러도 코카콜라를 마신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당신 또한 코카콜라를 마실 수 있다. 코카콜라는 그저 코카콜라다. 돈이 아무리 많다 해도 길모퉁이에서 부랑자가 마시고 있는 코카콜라보다 더 좋은 코카콜라를 살 수 없다. 모든 코카콜라는 똑 같으며, 모든 코카콜라는 맛이 좋다.   --- 예술가와 뮤즈. 유경희.p.207.


워홀은 물신을 믿었다.
1960년대 미국은 그게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누구나 평등했다.
그리고 조만간 사람들은 원하는 모든걸 다 할 수 있게 될거라고 생각했다.
번창하는 현실은 휘황했다.
인류의 오랜 소망인 유토피아는 손만 뻗으면 금방 잡힐것 같았다.
모든게 단지 시간의 문제처럼 보였다.
정말로 조금만 있으면 천국이 성큼 다가오리라 믿었다.

추상화의 주관적이고 엘리트적인 미학에도 상당히 질려 있었다.
오랜 역사의 꿈인 대중이 바야흐로 세상의 주인으로 등극하고 있었다.
생생한 살아있는 현실은 아름다웠다.
구체적 현실은 직접적으로 미적 쾌감을 주었다.
워홀은 그냥 현실이 예술적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다.
자본주의적 대량생산체제가 아름답게 보였다.
물신이 만들어 내는 풍성한 미국 현실을 숭배했다.

아마도, 한국사회에서 워홀식으로 찬미해야할 물신이 있다면 그건 라면 김연아 국가대표다.
누구도 이것들로 부터는 소외되지 않는다.
부자건 가난하건 똑 같은 라면을 먹는다.
서울에 살건 지방에 살건 똑 같이 김연아를 사랑한다.
나이가 많건 적건 똑 같이 국가대표의 성취에 감동한다.

그래서 워홀의 미감을 키치적으로 흉내내면 아래 이미지들이 나온다.

2. 앤디워홀의 키치적 번역



'라면 과 김치' :  다운받음.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깡통.



'김연아라는 본드걸' :  다운받음.




앤디워홀의 마릴린 몬로(실크스크린 인쇄).



'국가대표라는 영웅' : 다운받음


앤디 워홀의 마이클잭슨 초상화(실크스크린 인쇄).

3. 앤디워홀이 다시 살아 온다면

이제 누구도 물신을 믿지 않는다.
물신이 인류를 구원하리라는 20세기의 신화는 끝장났다.
단지 물신의 노예가 되어 허덕이고 있을 뿐이다.
물신이 깔아 놓은 메트릭스 내부에서 우리는 모두 숨까쁘게 내 달린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단지, 달리지 않으면 넘어 진다는 물신의 협박을 받을 뿐이다.
그게 오늘날의 삶의 진실이다.

앤디 워홀이 지금 현재를 산다면 어떻게 예술을 했을까?
그때 처럼 자본주의적 대량생산의 물신을 찬미했을까?
대량복제 이미지들의 현란한 메트릭스를 숭배했을까?

아마 그렇다면, 인터넷에서 이미지를 다운 받아 가까운 누군가에게 사인을 시키고, 그게 자기작품이라고 내 놓았을것이다.

아마 그렇지 않다면, 진지하게 독창적인 무언가를 만들거나 그릴려고 노력할거다.
그건 메트릭스의 휘황찬란함과 초췌한 현실의 어긋남에 대한 자화상이리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에서 그는 분명히 어떤 진보성을 보았다.
그러나 앤디워홀의 문제의식이 지금 여기 현실에서는 파탄난게 분명하다.
세상에 시간의 침식을 버틸수 있는것은 없다.
그래서 그의 미학은 숨을 거두었다.
아니면, 그의 문제의식은 자본의 교환가치로 재빨리 대체 되었다.
자본주의 시장이 그의 예술을 증류해서 돈으로 치환했다.

자본주의 시장은 몽환적으로 아름답고, 그 너머 현실은 폐허다.
이런 양 극단이 진자처럼 움직이는 운동의 자장을 우리는 숨가쁘게 오간다.
그렇다면 워홀은 아마도 '무상함의 알레고리'를 만들것이다.

< 무상함의 비유 >

Allegory of Vanity. Antonio de Pereda y Salgado (1608-1678). Oil on canvas 139.5x174cm (c.1654).
이미지참조 : 진중권. 현대미학강의.p.33.


cf)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워홀전시회가 있다는 광고를 보았다.
아이티희생자 이미지들과 겹치면서 뭔가 불편했다.
옛날 같으면 워홀의 가벼운 몸 놀림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라고 환호작약했을 것이다.
내 감수성이 변했는가?
겨울이라 우울해서 그런가?
진중권의 설명에 따르면 해골의 비유(알레고리)는 현대에 대한 바로코시대의 인식이다.
현대의 워홀적 꿈이 무너진 지금, 인류에게 진짜로 남겨진 것은 바로코의 이런 기괴하고 우울한 인식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