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읽기-영화보기

뱃살의 나르시즘



1. 혐오스런 뱃살  

삶은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소진하는 것이다 ---까뮈.

위대한 선사들의 죽음은 조용하다.
더이상 세상에 대한 여한이 없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도 없다.
자기 몫의 삶을 남김없이 소진한 삶을 살아낸 사람들은 텅비게 된다.
그들은 바람처럼 가볍다.
노추하게, 세속의 인간들처럼 그악스럽게 삶에 매달리지 않는다.
그래서 선사들의 마지막에는 향기가 난다.

까뮈가 삶을 구축이 아니라 소진으로 본것은 이걸 말하리라!

문제는 세속의 내가 주어진 삶의 몫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거다
무엇을 위해서 내 삶을 태워버려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할 수 없이 세속의 명령에 충실해지는 길 밖을 보지 못한다.
삶을 소진하는게 아니라, 거꾸로 삶을 쌓는다.
세속의 코드는 자본과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 날마다 삶을 쌓아야하는 나는 미련 곰탱이가 된다.
날마다 쌓여가는 내 뱃살이 미련 곰탱이의 배가 아니고 무엇일까?
자꾸 불러가는 뱃살을 소진해 태워버릴 무언가를 상상한다.

자전거 타고 무작정 돌아 다닐까? ㅋㅋㅋ.

2. 뱃살의 맛

성석제의 책을 읽는다.
미친 놈처럼 혼자 키들거린다.
가끔씩 눈물도 훔친다.
대단한 이야기 꾼을 한명 발견했다.
이제야 그의 책을 발견한게 후회가 된다.
이제라도 그를 발견한게 다행이라고 위안도 해 본다.
아뭏든 그의 책이 있어서, 지금 행복하다.
맛있는 뱃살을 술과 함께 먹을때 나는 제일 행복하다.
그래서 더욱, 지금 행복하다.

3. 맛있는 뱃살의 아름다움

삶은 길섶마다 예기치 않은 행운들을 숨겨 놓는다 ---니체.

니체의 '언제나 니 운명을 사랑하고, 긍정하라'는 말이 이제야 이해된다.
삶의 길섶마다 생각지 못한 행운이 깃들여 있는걸 보는 혜안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행복할 거다.
그런 사람은 자기 삶을 언제나 긍정하고, 사랑할거다.

날마다 눈 내리고, 추운 겨울이라 책에 코를 박는다.
그 속에도 이렇게 재미난 삶이 있다니, 놀랍다.
아마도 삶에는 이런 행운들이 널려 있을거다.
현실이라는 것에 발목을 잡혀 한가지 정체성에 묶이지 않는다면.
그것에 단단히 고정되어 습으로 굳어지지 않는다면.
그래서 그 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아니면, 최소한 그 습을 즐길정도 만이라도 습을 자신으로 부터 객관화 시킬 수 있다면.

20대 이후로 내 습은 알콜중독이었다.
술 먹을 때 내 몸속에서는 기분을 좋게한다는 도파민 호로몬이 생성된다.
술이 식도를 넘어가면 그게 생생하다.
특히 공복에 술을 마시면 더욱 그렇다.
식도를 타고 흐르는 알콜의 알싸함이 혈관에 흐르고, 그건 곧바로 말초혈관을 돌아 발끝, 머리끝, 손끝, 혀끝을 부드럽게 애무한다.
몸은 해롱 해롱 한데, 거꾸로 정신은 이제야 세상이 안정되었다고 말한다.
안정된 정신은 주변 사람들에 무제한적인 호감을 베푼다.
에-응, 인자 이차 카자, 헤벌쭉.
이제 세상은 꽉 찬다.
내 몸이 핑핑 돌아 니 정신이 되고, 니 정신은 내 혼돈이고, 내 혼돈은 니 아픔이고, 니 아픔은 내 아픔이 된다.
모든게 뒤죽 박죽으로 얼키면서 갑자기 세상이 환해진다.
자아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자아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빈틈없이 침투한다.
충만하게 채워진 일체감은 너를 나라고 호출하고, 나를 너라고 호명한다.

이게 뱃살의 1차 근거다.
한마디로 술 뱃살이다.

이 뱃살을 다른 뱃살로 조금씩 바꾼다.
성석제가 조금 다른 뱃살을 만든다.
그게 맛있는 뱃살이 아름다운 이유다.


4. 아름다운 나르시즘
이 글은 결국, 나는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꼴이다.
내 이런 나르시즘을 사랑한다.
그게 지금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고, 지금 행복한 이유다.

cf) 성석제의 글 쓰기를 흉내내 보았다.
누군가 한사람이라도 내글을 읽고 웃는다면 성공한거고, 그렇지 않으면 미친놈 헷소리한거다.
아무거라도 좋다.
어떻게든 세상과 소통한거라고 생각한다.
아뭏든 누군가를 웃게 만든다는거 정말 대단한 축복이다.
성석제는 그점에서 천재다.
그것도 세상의 진실을 환하게 드러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