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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영화보기

연애의 목적

2005. 10. 11



심심해서 비디오 빌려다 영화를 봤다.
선생들이 등장하고,
학교가 배경이어서,
매우 친숙한 영화였다.

사랑하는 두사람의 관계가,
두사람이 놓인 사회적 관계들에 불화하는 설정도 매우 친숙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래서 엄청 긴장이 되었다.

영화를 다 보고나서,
그렇게 생각했다.

사랑을 대하는 남자와 여자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여자는 사랑을 통해서 영원한 관계를 꿈꾸고,
그것을 두사람의 관계 속에서만 해석한다.

남자는 사랑을 사회적 관계속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남자는 사랑때문에 발생하는 새로운 자기존재를 설정할때 대단히 복잡해진다.
여자처럼 간명하게 두사람의 관계에 집중할 수 없다.

사회적 관계들과 사랑이 불화할 때,
남자는 적당한 타협을 모색하고,
가부장제에 기초한 사회도 그런 타협을 강제하는 공범자가 된다.
아니 사회는 그리고 현실은 무지막지한 힘으로 사회적 관계들과 불화하는 사랑을 파괴한다.

현실과 불화하는 사랑을 하게 될때,
결과적으로 남자는 여자를 파괴하거나,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두가지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 받는다.

강혜정과 박해일의 사랑이 현실과 틀어져서,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박해일은 사랑으로 쓰라린 상처를 준 강혜정의 전 남자처럼 강혜정에게 상처를 주고,
완고한 현실의 대변자가 되어야 한다.

사회의 여러 관계들의 종합이 그렇게 스토리를 만든다.
그것이 완고한 남성중심 사회의 결말이다.

사회적으로 나약한(?) 여자 강혜정은,
또 한번 사회로부터 추방되어야한다.

그러나 영화는 영리하게,
이런 통속적 스토리에 비수 하나를 숨겨놓았다.
실패한 사랑의 상처를 켜안고,
무지막지한 현실의 무게에 짖눌려 처철한 고통을 견뎌내야할,
연약한 강혜정이,
반란을 일으킨다.

영악한 그녀는 잘 알고 있다.
박해일이 결코 결단할 수 없다는 것을.
그가 자기 존재를 전부 내 던질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사랑하는 박해일을 파멸시키기로 한다.
이것이 그녀의 사랑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그녀는 본능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정말로 사랑에 빠진 여자는 그걸 알지 않을까?

그래서 그녀는 박해일을 파멸시키고,
그런 그를 온전히 소유한다.

사랑에 울지 않는 여자라는 마무리는 그런점에서 깔끔하고 진부하지 않다.
신파로 전락하다가 막판에 극적인 반전을 시도한다.

마르고 닺도록 우려 먹어도 또 우려먹을 수있는 주제가 사랑이니,
이 영화의 제목 '연애의 목적'은 영화의 결말만큼이나 앙큼하다.

대체 연애의 목적이란?
영화의 답은 이렇다

사랑하는 대상을 완벽하게 소유하는 거다.
그에 대한 방법은?
 영악하게 세상을 속여야한다는 거다.

영화를 보고 나서 쓸데없이 든 또다른 상상은 영화속 캐릭터들이 너무 밋밋하다는 거다.

박해일을 총각 선생이 아니고 유뷰남 검사 정도의 캐릭터로 삼았더라면,
그에게 남성중심의 가부장적인 좀더 무거운 상징들을 입혔더라면,
강혜정의 반란이 신파적 사랑 놀이의 한 부분으로 보이지 않았을 텐데!

그러면 너무 여성주의적 정치영화가 될까?
내 상상력은 결국 현실권력이 엉켜진 마초적 성향을 벗어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