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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먹기 또는 놀기

아버지


술취한 상태에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 몇개의 아이디어 비슷한 것을 메모했다.
다음 날 술에서 깨어나 보니, 그때의 느낌들이 몽땅 다 날아간 것을 알았다.
지워버릴까 하다가 무언가 다시 잡히는게 있어 물고 늘어져 본다.

글은 존재가 포획되어 있는 지점을 표현한다는 것을 최근에 좀더 명확하게 느낀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내가 아직도 과거에 포획된 부분을 이 글은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를 벗어나야 존재가 탄생한다.
아버지를 대신해서 나를 어떻게 만들것인가?
아버지는 영원한 숙제다.
아버지가 존재의 독립을 위한 한계로 존재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아버지의 계승과 존재의 독립을 위한 경계는 어딘가?
아버지는 사회적 윤리와 금기체제인가?
결국 아버지는 사회적 총체성의 대리자다.
사회적 총체성의 대리자로서 아버지가 존재할 때 그 아버지는 억압의 상징이 되는걸 피할 수 없다.

다른 방식의 아버지의 존재는 불가능한가?
아버지의 표상에 대한 전복이 자유로운 관계를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사회적 총체성의 표상으로서 아버지가 아닌 다른 아버지의 존재 방식을 만들어 내는게 결국 혁명의 길이다(술 취해서 써 놓은 부분).

프로이드의 가족모델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아버지를 그려 놓았다.
이런 식으로 존재하는 아버지를 피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그건 친구가 되는거다.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어른이다.
그럴러면 세속이 강요하는 역할극으로 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
결국 자기해방 또는 자기실현을 전제한다(술 깨고 나서 쓴 부분).

cf) 요즈음 '제국'과 '다중'이라는 책에 매몰되어 지낸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을 해체하는 것에 열광하면서 10년 이상을 살았다.
해체에 중심이 실린 포스트모더니즘 뒤에 남는것은 허무다.
그런 허무를 극복하고, 무언가 현실을 새롭게 쓸 수 있는 길들이 언듯 언듯 보이는것 같다.
그게 기쁘긴한데, 책장이 너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