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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영화보기



청소년기 이래로 일상에서 술이 끊이지 않았다.
덕분에 술에 관한 책이나 글들을 적지 않게 읽었다.
상당한 수준인 알콜 중독를 해결하려는 본능적 요량이었다.

글로 표현된 술에 관한 제일 많은 입장은 술을 죄로 보는 관점이다.
술을 죄의 근원으로보는 관점에서, 알콜중독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전세계적인 모임이 있다.
alcoholics anonymous(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라고 불린다.
약자로 AA모임이라고 한다.
한국에도 왠만한 중소도시까지 이 모임이 조직되어 있다.

AA류의 관점은 술을 죄악과 관련시킨다.
이런 관점 뒤에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다.
술에 관한 의존은 과거에 저지른 죄의식을 숨기려는 행위라고 본다.
결과적으로 기독교적 참회과정을 통해서 술에 대한 의존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술에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덧칠하는 관점이다.

<영화 속에서 니콜라스케이지가 모든 것을 잃고 술 마시다 죽는다. 그가 술을 마시는 이유는 단지 죽기 위해서다. 그의 연기가 너무 적나라해서 좀 끔찍하다.>

술에 관한 두번째 관점은 술을 중립적인 기호물질로 보는 것이다.
술이란 그냥 음식물의 하나라고 본다.
술에 도덕이나 종교의 외피를 걷어냈다.
술이란 그냥 화학적으로 알코올이 함유된 물이라는 관점을 취한다.
술에 관한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가치판단을 지우고 나면 기호음식으로서 술이 투명하게 비춰진다.

이런 관점을 취하면 금주에 대한 요구가 거의 제거된다.
술을 기호식품으로서 잘 소비하는 방법이 술에 대한 요구로 제기된다.
삶을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음주방법이 술에 관한 서술로 등장한다.

마시는 술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는 담론들이 무성하다.
최근의 현상이다.
포도주가 술 시장의 대중주로서 출현하면서 유포된 언설이다.
대략 고급스럽고 비싼술을 마시면 좋다는 말과 일치한다.
술을 억제해야한다,는 언설은 깨끗하게 증발한다.
술에 관한 가치판단의 중지와 함께 '술'만 남는다. 
결과는 술을 적극적으로 권한다.

술에 관한 가치중립적 접근이 사실은 술을 권하는 강력한 이론으로 작동한다.
대개의 경우, 가치판단을 제거하는 공평무사한 관점들이란 이런식으로 현실을 강화시키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
중립, 공평무사 같은 현명함을 내세우는 단어들은 사실은 힘센 현실편이라는 입장을 위장하는 관점이다.
어느 경우에나 이런 단어들은 중립적이지도 않고, 공평무사하지도 않다.
술의 경우에도 정확하게 그것이 작동한다.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언어는 현명함이다.)


대략적으로 술에 관한 입장들이란 위의 두가지 중의 하나다.

그런데 몇일전 김영민의 책 동무론을 읽으면서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을 했다.
술에 관한 전혀 새로운 해석을 발견했다.
막연하게 술에 관해서 가지고 있던 어떤 의구심을 말끔하게 정리해주었다.

김영민은 우리가 일상에서 행하는 행동들의 대부분이 현실체제의 효과라고 본다.
현실체계란 자본주의 사회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우리의 신체에 새겨 넣은 습관의 결과가 우리의 일상이라는 거다.

그는 술도 이런 관점에서 해석한다.
주목하는 지점은 두가지다.
첫째는 술의 습관성이다.
일상을 마치고 습관적으로 마시는 술이란 체제의 요구다.
술을 마심으로서 체제의 기능을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돕는다.
직접적으로는 체제의 의사결정이나 집행을 원활하게 해준다.
집단회식자리의 술 문화는 구성원을 결속시키는 일종의 제의양식과 비슷하다.
'우리가 남이가! 조직의 발전을 위하여!' 같은 구호들로 개인들을 강력하게 결속시킨다.
술이 구성원 간의 차이를 없애는 평균자 역할을 한다.
조직 내부의 우둘두툴한 걸림들을 매끄럽게 한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술 자체가 체제를 구성하는 강력한 한 부분이다.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체제의 한 부분이 술로 구성되어 있다.
체제는 이런 요구들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도록 요구하고 있다.
체제의 단말기인 개인의 신체는 이런 행동을 자기 신체에 새긴다.
그게 술 중독증이라는 거다.

첫 번째와 겹치지만 또 다른 주목해야할 지점은 술이 주는 무상양여의 정서적 위무감이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골목의 술집마다 사람들이 넘쳐난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인격조차도 자본주의적 교환체계에 종속시킨다.
이 속에서 개인들의 인격적 모멸감이나 소외감은 불가피하다.
일상에서 모든 개인들은 자본주의적 교환체계로 고통 받는다.
근데 술은 직접적으로도 무상양여의 형식을 띤 경우가 허다하다.
설사 무상양여의 술 자리가 아닌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미시적인 수준으로 들어가면 술의 무상양여 형식은 더욱 분명하다.
술을 서로 권하고 청하는 술상에는 무한정한 무상양여의 정서가 범람한다.
술을 마시는 행위는, 자본주의적 교환관계의 치열하고 척박한 현실속에 뚫린 정이 넘치는 피안의 세계로가는 탈출구멍 처럼 보인다.
이 경우에 술의 습관화는 현실도피적 삶을 만든다.

김영민이 보기에, 현실속에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낭만적인 술은 없다.
두보, 이태백, 고은 같은 사람들이 마셨던 언어를 부풀리고 정서를 고양시키는 술은 없다.

<Leaving Lasvegas의 정조는 우울함이다.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도 상당한 기간동안 우울함을 떨치기 힘들다. 니콜라스 케이지의 연기가 그 만큼 압도적이다.>

cf) 나는 김영민의 글을 읽고, 내 술버릇에 대한 큰 통찰을 얻었다.
그에게 내 치부중 일부를 들킨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뒷덜미가 뜨뜻해지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음 날, 날이 새도록 술을 마셨다.
올해들어 가장 많이 마셨다.
대취했다.

술을 마시면서, 김영민의 술에 관한 力說은 술을 더 많이 마시게하는 逆說을 낳는다.고 키득거렸다. ^^.

cf) 이 글은 김영민의 '동무론'에 기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