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집중하다보면 블로그를 챙길 여유가 없다.
아니면, 현실과 블로그에 집중하는 일의 적정한 배분과 균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해야 하나!
거기다, 나 같은 경우 알콜 중독 성향이 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균형을 유지하자면, 현실-블로깅-알콜중독을 적정한 선에서 조절해야 한다.
이게 말처럼 쉬운게 아니다.
결과로,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순간들이 많다.
더 큰 문제는 블로그질이 일정하게 나르시즘을 발생시킨다,는 점이다.
소통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나르시즘에 빠진 고립의 도구로 블로그가 기능한다.
얼마전 부터 내팽겨 두었던 블로그를 다시 챙기기 시작했다.
자연히 블로그질에 많은 에너지가 투입된다.
줄어드는 에너지는 현실을 챙기는 일이다.
이러면 현실에 빈 구멍이 송송 뚫리기 시작한다.
여기가 현실과 블로깅의 균형을 다시 회복해야하는 임계점이다.
세속적 현명함의 한계 지점이다.
물론 그 경계를 돌파하면 또 다른 세계가 있다.
그럼에도 필요한 것은 일종의 균형잡힌 현실감각인데, 괴물적 감수성이다.
현실은 주류코드로 변환된 신호를 강박적으로 송신한다.
이렇게 송신된 신호는 신체에 새겨진다.
현실이라는 체계가 신체에 새긴 코드는 표준화된 사고와 행동양식을 만들어 낸다.
무기력하게, 체계가 발신한 코드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기계적 인간으로 전락한다.
분명한 자의식에 따른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그 선택은 이미 체계에 의하여 주어진 것 바깥이 아니다.
주체는 외부에 이미 제작되어 신체에 입력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본능적으로 사람들이 무기력감을 느끼는 이유다.
이걸 벗어나는 것은, 괴물적 감수성을 획득하는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현실을 표준화된 코드가 송신한 것과 다르게 감수하는거다.
체계에 의하여 변환된 표준코드가 만들어내는 감수성이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생생한 감수성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괴물적 감수성 일 수 밖에 없다.
현실을 존재하는 날것 그대로 순수하게 감수하는 능력이다.
요즈음 가장 단정한 누군가를 조지느라 정신없다.
표준화된 코드로 잘 다듬어진 사람의 매끈함을 걷어내면 순수한 괴물이 나타난다.
그 순수한 그대로의 괴물을 노출시는데는 새로운 힘과 권력이 필요하다.
그 힘 또는 권력은 그러므로 전혀 새로운 괴물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러니 그건 괴물적 현실을 창조하는 일이다.
괴물로 괴물임을 폭로하는 일이니, 괴물 간의 충돌이라고 해야하나?
김영민 식으로 말해서, 괴물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그 괴물이 나를 응시하는 형국이 된다.
베이컨이 자신의 초상화를 그릴 때 아마도 그런걸 말하고 싶었을거다.
베이컨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건, 원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말이다.
표준코드로 부터 오염되지 않은 자유, 주관의 극단을 향해서 치달리는 일이다.
그게 생생한 살아있는 진짜 현실이다.
그러므로 균형잡힌 현실감각이란 비뚤어지고 뭉게져서 균형을 잃은 세속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감수성이다.
(프란시스 베이컨. 자화상. 1917. 캔버스에 유화)
아니면, 현실과 블로그에 집중하는 일의 적정한 배분과 균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해야 하나!
거기다, 나 같은 경우 알콜 중독 성향이 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균형을 유지하자면, 현실-블로깅-알콜중독을 적정한 선에서 조절해야 한다.
이게 말처럼 쉬운게 아니다.
결과로,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순간들이 많다.
더 큰 문제는 블로그질이 일정하게 나르시즘을 발생시킨다,는 점이다.
소통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나르시즘에 빠진 고립의 도구로 블로그가 기능한다.
얼마전 부터 내팽겨 두었던 블로그를 다시 챙기기 시작했다.
자연히 블로그질에 많은 에너지가 투입된다.
줄어드는 에너지는 현실을 챙기는 일이다.
이러면 현실에 빈 구멍이 송송 뚫리기 시작한다.
여기가 현실과 블로깅의 균형을 다시 회복해야하는 임계점이다.
세속적 현명함의 한계 지점이다.
물론 그 경계를 돌파하면 또 다른 세계가 있다.
그럼에도 필요한 것은 일종의 균형잡힌 현실감각인데, 괴물적 감수성이다.
현실은 주류코드로 변환된 신호를 강박적으로 송신한다.
이렇게 송신된 신호는 신체에 새겨진다.
현실이라는 체계가 신체에 새긴 코드는 표준화된 사고와 행동양식을 만들어 낸다.
무기력하게, 체계가 발신한 코드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기계적 인간으로 전락한다.
분명한 자의식에 따른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그 선택은 이미 체계에 의하여 주어진 것 바깥이 아니다.
주체는 외부에 이미 제작되어 신체에 입력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본능적으로 사람들이 무기력감을 느끼는 이유다.
이걸 벗어나는 것은, 괴물적 감수성을 획득하는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현실을 표준화된 코드가 송신한 것과 다르게 감수하는거다.
체계에 의하여 변환된 표준코드가 만들어내는 감수성이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생생한 감수성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괴물적 감수성 일 수 밖에 없다.
현실을 존재하는 날것 그대로 순수하게 감수하는 능력이다.
요즈음 가장 단정한 누군가를 조지느라 정신없다.
표준화된 코드로 잘 다듬어진 사람의 매끈함을 걷어내면 순수한 괴물이 나타난다.
그 순수한 그대로의 괴물을 노출시는데는 새로운 힘과 권력이 필요하다.
그 힘 또는 권력은 그러므로 전혀 새로운 괴물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러니 그건 괴물적 현실을 창조하는 일이다.
괴물로 괴물임을 폭로하는 일이니, 괴물 간의 충돌이라고 해야하나?
김영민 식으로 말해서, 괴물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그 괴물이 나를 응시하는 형국이 된다.
베이컨이 자신의 초상화를 그릴 때 아마도 그런걸 말하고 싶었을거다.
베이컨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건, 원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말이다.
표준코드로 부터 오염되지 않은 자유, 주관의 극단을 향해서 치달리는 일이다.
그게 생생한 살아있는 진짜 현실이다.
그러므로 균형잡힌 현실감각이란 비뚤어지고 뭉게져서 균형을 잃은 세속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감수성이다.
(프란시스 베이컨. 자화상. 1917. 캔버스에 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