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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대기

변명도 벼리면 칼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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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 - 변명도 벼리면 칼이 되나?

(전남교육연구소 운영위원장 : 이**. 2019.12.07)

처음 전남교육연구소의 일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현직에서 교사로서 역할수행을 했던 과거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마등을 스쳐가는 바람처럼, 까맣게 묻었던 과거의 모습들에 조명이 쫘르륵 지나갔습니다. 매사에 무능과 냉소로 현실을 버텨냈던 모습이 전부였습니다. 한마디로 자격이 없다는 판단이 제일 앞서고, 그런 뒤켠 어딘가에 그런 무능과 냉소를 변명해 보고 싶다는 심리가 꿈틀거렸습니다. 그러면서 시간과 함께 뒤켠의 변명 욕망이 앞선 직관적 판단을 조금씩 허물었습니다. 결국 현직에서의 무능과 냉소를 어떻게든 변명해 보자는 욕망이 이긴 것이지요.

그러므로 변명으로서 일을 해보겠다고 결심한 셈이 됩니다. 그래서 전남교육연구소를 통한 모든 제 말들에는 변명이 배경으로 자리합니다. 열심히 변명을 해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뭔가 대단한 변명의 성채를 쌓으려나 보다, 라고 오해가 생길 것 같아서 덧붙입니다.

얼마 전 법륜스님의 강연에 갔었습니다. 거기에 현직의 누군가가 정말 좋은 선생으로서 살고 싶은데, 잘 안된다고 하소연하는 장면을 만났습니다. 법륜 스님이 그 선생님한테 면박을 주면서, 선생의 일이 무언가 대단한건 줄 아는 모양인데! 선생 너의 고민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이성복)’는 것을 깨닫고, 그저 월급이나 따복-따복 받으면서 네 인생이나 행복하게 잘 보살피라고, 꾸지라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해석을 붙이자면, 너의 좋은 선생이 되고자 하는 강박이 오히려 아이를 망칠 수도 있다. 네가 행복하게 잘 살면 훨씬 여유 있어 지면서 아이도 넉넉하게 품어줄 수 있다. 아이는 세월과 함께 나름으로 성장할 테니, 스스로를 달달볶지 않아도 된다. 너의 강박은 어쩌면 체계가 너의 내면에 심어놓은, 학생들을 지위 배분해야하는, 체계의 능숙한 하수인 역할일 수도 있다. 그런 정도로 갈무리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법륜을 안이하게 해석하면 현실의 문제에 대한 치열한 맞대면의 피로를 회피하게 만드는 보수성의 위험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학생을 즉각적인 조작적 대상으로 간주하는 위험을 지적하는 생산적 시각도 또한 제공합니다.

법륜의 생각을 현실에 대한 치열한 투쟁의 관점에서 정리하면, 학생들을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간주하는 장기적이고 폭 넓은 시선을 가지라는 충고입니다. 이런 시각을 학교현장에서 실천하다보면 결국 어딘가에서 체계와의 정면승부를 피할 수 없는 국면에 맞닥칩니다. 쉬운 현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고백하자면, 저는 그런 순간들을 대부분 비겁하게 피하면서 현장을 버텨왔습니다.

아무튼 법륜 스님의 이런 방편적인 상담 내용을 들으면서, 그때, 연구소일이 대수겠어? 한다고 승낙했으니, 되는대로 대충대충 어영부영 하다가, 시간이 되면 어떻게 굴러가겠지! 중간 이음새나 부로커의 역할, 그런 비슷한 일을 하는 시늉을 하면 되겠지! 라는 방편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한번 엎어졌던 연구소를 다시 엎어먹는 일이 대수냐? 라는 막연한 배짱이 생겼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정리하자면, 저는 개인적으로 전남교육연구소의 일을 변명과 임시방편을 무기로 삼아 하겠다는 입장입니다. 변명과 임시방편이 현실의 벽을 돌파하는 칼이 될지, 아니면 현실이라는 벽에 무기력하게 항복하는 하얀 깃발이 될지는, 아마도 주변에 사람이 어떻게 모이느냐에 달려있겠지요. 연구소 일이 한두 사람의 능력이나 성실함으로 채워지겠습니까? 변명과 임시방편의 한편으로, 때때로 여기저기 사람도 모아보고 능력도 모아보고 일도 모아보고 하면서, 여러 사람 귀찮게 할 것 같습니다. 부디 그런 요구들을 사양치 마시고 같이 해주신다면, 그 음덕으로 버티겠습니다.

더불어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일단은 연구소의 형태나 틀이 전무한 상태입니다. 거창하게 ‘이사장-소장-운영위원장-운영위원회’의 껍데기만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분과를 누구로 어떻게 채울 것인지, 아무것도 정해진 바가 없습니다. 주변에서 사람도 생각도 돈도 십시일반으로 거들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