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전남교육희망포럼 “코로나19 이후 전남 미래 교육을 상상하다”에 붙이는 뒤 늦은 고백.
모든 고백은 권력의지를 뒤에 숨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도 그런 권력의지를 당연히 장착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물론, 그런 권력의지는 사적수준의 것입니다. 이렇게 외설적으로 속마음을 노출하는 것은, 사적 친밀성에 물들어 당사자들이 서로를 객관화시켜 볼 만큼 충분한 거리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정황에 대한 묘사입니다. 막말로, 이틀이 멀다하고 서로가 술잔도 부딪히고, 같은 국그릇에 수저를 휘젓는 사이에 무슨 거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사적인 친밀성을 뛰어 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저-주저-주저 하다가 하염없이 시간이 지나갔고, 이제야 무언가를 투덜거리게 되었다는 변명입니다.
덧붙이자면, 사적인 관계에 묶여서 처신하는 것은 아닌것이라 생각하여, 뒤 늦게 ‘전남교육정책연구소’에서 진행한 “코로나19 이후 전남 미래 교육을 상상하다”라는 포럼<포럼의 원래 의미는 광장이다. 공간을 받쳐주는 기둥들이 즐비하고, 기둥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광장에서 사람들이 모여 토론하는 공간을 포럼이라고한다. 이런 건축학적인 비유를 논리적 건축으로 번역하면, 포럼은 글로 만들어진 기둥(column)들의 조합이다. 보통 기조발제 기둥(column), 주제발제 기둥(column), 지정토론자 기둥(column)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논리적 사고를 건축하는 광장이 포럼이다. 그래서 져널이라는 이름을 달고있는 매체의 칼럼들은 그 매체의 주요기둥이고 나머지 기사들은 그 기둥을 받쳐주는 자잘한 사실들의 보조기둥 건축물이다. 결론적으로 포럼은 칼럼들이라는 기둥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토론공간을 의미한다.>에 대한 개인적 평가를 시도합니다. 개인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직 ‘전남교육연구소’가 공적인 조직으로 명확하게 자리잡은 상황이 못되는 현실에 근거합니다. 세상 일의 공사가 칼로 무우 베듯이 명확하게 분별되는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대체적인 상식에 근거한 정황적 판단으로 보더라도, ‘전남교육연구소’는 아직 사적 수준의 성격을 극복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이글이 연구소라는 이름을 걸고 집단적으로 진행한 결과가 아니기에 개인적이라는 한계수준을 설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1. 포럼에 대한 개인적 평가
사전에 포럼을 기획하고 있다는 언질도 못 받았고, 포럼에 초대 받지도 못했던 지라, 뒤늦게 인쇄물로 포럼 상황을 파악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인쇄물의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는 이런저런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코로나로 열린 시대상황이, 전혀 새로운 교육적 상상력을 요구하는 국면이어서, 기존의 틀에 묶인 구태함이 아닌 새로운 호흡의 숨결을 막연하게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전교조 해직교사 출신의 진보교육감 체제하에서 명망있는 활동가들이 포진한 전남교육정책연구소에 대한 기대감이 작용했다고 보아야겠지요.
제일먼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열심히 노력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외부의 대학교수인 한국교원대 기조발제자와 내부의 장학관을 포럼의 주요 기둥(column)으로 세우고, 학부모-학생-장학사-교육위원 등으로 지정토론자들을 보조기둥으로 세우는 과정에 투여된 관료적 진행절차가 눈에 선하게 들어왔습니다. 그 과정에 투여된 노동과 시간과 땀이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참여자들이 가진 일종의 존재구속성의 한계 같은 걸 체감하는 건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코로로나로 촉발된 한계상황에서 학교개학이라는 과제를 해결하는 방편인 비대면 교육수행을 전남교육청이 어떻게 효율적으로 대처했는지에 대한 정당화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국가체계에 묶인 정황을 고려하면, 그걸 이해하지 못할 바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급작스런 한계상황을 창의적인 개혁의 기회로 살릴수도 있었을 텐데!’라는 유감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메인 기둥(column)으로서 교원대교수의 발제 내용은 죽여도-죽여도 죽지 않는 지식인의 전형 그대로였습니다. 본인의 분명한 입장 없이, 백화점식으로 이런 저런 교육과 관련된 논의들을 모두 다 진열해 놓았습니다. 이렇게 백화점식으로 진열해 놓으면, 어떤 상황의 요구에라도 맞출 수 있는, 다중 가면을 쓰고 있는 효과가 생깁니다. 일종의 다중코드 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갖은 지식의 정상성과 비정상들을 판단하고 등재하는 제도로서 대학이라는, 공적제도에 포섭된 지식인들이 이런 식으로 언거번거하게 말하는 것은 일종의 존재구속성에 나오는 습관입니다. 판매되는 상품화된 지식의 상인으로서 역할 수행과정에서 읽힌 몸에 벤 습관입니다.
통계수치로 범벅한 두 번째 발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통계적 수치를 산출하기 위하여 사용된 계측도구는 연구자 개인의 입장이 물질화된 것이다’라는 것이, 이제는 거의 상식화된 이론입니다. 이런 이론에 대입해서 살펴보면, 두번째 발제는 첫번째 발제의 통계적 정당화에 해당합니다. 첫번째 발제의 보충설명을 기능적으로 수행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기조발제에 해당하는 첫번째 기둥(column)과 주제발제에 해당하는 두번째 기둥(column)에서, 전자는 이론이고 후자는 그걸 뒷받침하는 통계수치라는 기능으로 잘 순접하고 있으니, 포럼은 형식상으로 매끄럽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현장에 참석한 참석자들에게서 도교육청이 어떤 입장인지 알지도 못하겠고, 도대체 무얼 주장하는지도 모르겠다는 불평들이 나왔습니다. 초대받지 못해서라는 편리한 변명을 방패삼아서 말하자면, 현장에 참석하지 않아 현장에서의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지 못하나, 참석자들 몇몇의 말을 통해서 유추해볼 수 있는 결과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전남도 교육청이 응급한 비대면 개학상황을 효과적으로 대처했다는 정당화의 내용 중심으로 진행된 것 같습니다. 응급한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했다는 면피용 자기과시 또는 자기선전의 장식으로 포럼을 사용했다는 겁니다.
이런 불만들을 전남교육정책연구소에서 미리 통제하거나 예측하지 못한 것은, 전남교육정책연구소의 진보적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자기 인식의 부족에 기인합니다. 다른 측면에서는 상위단위인 전남도교육청이 진보교육에 대한, 다시 말해서 개혁에 대한 자기정립이 부족하다는 반증입니다.
2. 대안적 상상
세상일이 다 그렇듯이 모든 위기는, 위기의 이면에 기회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기인하는 학교가 멈추는 위기상황은 학교의 타성적 관행을 크게 흔들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런 기회의 측면을 살리자면 학교교육의 전면적인 재설성입니다. 그러자면, 학교교육의 과거에 대한 철저한 청산작업을 전제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은 입시위주의 교육에 대한 청산이고, 자기반성입니다.
과거 청산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에 기반한 새로운 공동체의 정립에 관해서라면, 독일의 예를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독일의 예는 인류가 발견한 가장 모범적이고 성공적인 사례입니다. 일종의 표준적 과거청산의 범례입니다. 구체적인 하나의 예시를 제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내부에는 감성적 체험이 극대화되는 특징적인 공간적 장치가 있는데 바로 “공백의 기억(Memory of Void)”입니다. 바닥에는 이스라엘 현대미술가인 메나쉐 카디쉬만(Menashe Kadisgman)의 작품이 있습니다. 희생된 유대인 얼굴의 형상을 한 원형의 강철 조각은 각기 다른 형태의 얼굴을 나타내며 바닥에 불규칙하게 깔려 있습니다. 관람객이 밟고 지나갈 때 강철 조각들의 마찰음은 마치 유대인들이 학살당할 때의 비명소리처럼 좁고 깊은 공간에서 공명하며 울려퍼집니다. 공간을 지나게 되면 이 닫힌 공간에서 모든 방문자는 고요한 적막과 더불
어 과거의 회상에 잠시 빠지게 됩니다> 출처 : http://blog.rightbrain.co.kr/?p=4700
옛날에는 일주일에 한명씩 청소년 자살이 이루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요즈음은 청소년 자살이 거의 어디서도 이슈도 안 됩니다. 그저 경쟁에서 패배한 언급할 가치도 없는 패기물 정도로 취급됩니다. 전국의 거의 모든 시도들이 진보교육감이 자리를 잡은 상황에서도 이런 현실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 과거의 입시위주 교육의 희생자들에 대한 호출을 대대적으로 진행하면 어떨까요. 확실한 과거청산의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억울한 희생자들을 해원하고, 새로운 진보적 교육관행을 시작하는 초석으로 자리매김 한다면, 그들의 희생을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모든 희생자는 새로운 체제 설립의 초석이라고 했으니, 그들의 희생을 새로운 교육체제 설립의 추춧돌로 삼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희생자들에 대한 텍스트를 촘촘하게 발굴하여 씨실로 삼고, 희생자들에 대한 위에서 제시한 것과 같은 조형물로 날실을 삼아서, 현실을 짠다면, 새로운 대안적 학교의 모
습이 형상화 되지 않을까요? 한국사회 개혁의 새로운 호흡을 불러오지 않을까요? 최소한 진보교육감 체제의 직무수행의 표준적 준거점이라도 설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3. 연구소라는 기구의 기능 : 외부의 차이를 내부로 번역하여 조직의 과거 의존적 경로를 흔드는 것.
진보교육감 체제하의 도교육청이 과거의존적 경로에서 허우적 거리면, 내부에서는 진보교육감의 효능에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오래된 과거의 축적물인 타성의 힘에 휩쓸린 내부는, 이익추구적인 요구들이 분출합니다. 진보교육감 체제의 진보적 의제를 중심으로 현장이 통할되지 못하는 현실의 틈새를 교육관련 행위자들이 이익집단화하여 파고들기 때문입니다. 교육행정이 교사의 업무를 지원하고 보좌한다는 것은 법률적으로도 교육학적으로도 직무수행의 기본원칙입니다. 학교교육 행위자들의 위상학적 우선 순위가 흔들릴 정도로 내부자들이 자기이익 관철에 목메다는 행태는 진보교육감 체제의 진보적 의제중심으로 현장이 통할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의 사례로 전체를 해석하는 무리가 있지만, 아래의 대화는 도교육청이 과거의 오래 굳어진 타성에 젖은 직무수행에 포박되어 있다는 사례입니다.
< 우연히 곁에서 들은 어떤 대화 >
<배경 : 초등학교 영재교육 영재교육은 국가예산으로 운영하는 일종의 지역사회 유력자 자녀들을 위한 공적사교육이다. 공적사교육이라는 말이 형용모순이기는 하지만 교육청이 운영하는 사교육이니, 형용모순인 언표속에 영재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사업의 부당성이 선명하다. 공적인 국가의 재원을 사적으로 유용하여 개인화하는 부당한 교육의 행태는 ‘지역사회영재교육-특목고-서울대’라는 패턴을 가지고 있다. ‘영재교육-특목고-서울대’라는 라인을 따라서 국가의 공적 재원을 사적인 개인의 이익으로 치환하여 편취하는 행태를 바꾸는 것은 일종의 제도의 근대적 합리성의 제고에 해당한다. 그런측면에서 보자면 한국의 교육체제는 아직 근대성에도 한참 미달하는 봉건성이 횡행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여러 영역들이 후기근대적-근대적-봉건적 형태들이 동시에 혼재되어 있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사회라고 하지만, 그만큼 혼란스럽고 복잡다단한 사회라고 하지만, 교육영역의 근대적 합리성제고는 시급한 해결과제다. 특히 1000년의 봉건적 군국주의 국가라는 일본제국주의가 심어 놓은 봉건적 군국주의의 잔재는 오늘도 여일하게 학교문화속(SCHOOLING HABITUS)에 면면하다.>
(배경 : 초등학교 영재교육 대상 학생 모집과 운영에 관한 프랭카드가 학교담장에 걸려 있음)
A : 진보교육감 체제에서도 초등-중등 학교의 영제교육 프로그램이 저렇게 뻔뻔하게 광고될 수 있습니까?
B : 그거 건들면, 지역사회 주요 의사결정자들(opnion leaders)의 이익에 반하기 때문에 표 다 날라가서 위험합니다.(부연 설명을 덧붙이자면, 당연히 A는 영재교육에 대해서 오랫동안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던 어떤 교사이고, B는 도교육청의 장학관급 직위에 있는 관료이다)
이런 대화의 사례 하나로 전체를 표상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문제의 일단이 있다고 말하는 사례로는 충분할 것 같습니다. ‘전남교육정책연구소-도교육청-국가체제’라는 관료적 위상 때문에 현실에 단단히 포박당하는 처지를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정책연구소는 내부에 외부성을 주입하는 기구입니다. 도교육청이라는 몸체가 가진 전위적 기구로서 외부를 부단히 탐문하고 살피는 기능을 합니다. 그래서 내부가 자기나르시즘에 나르시즘이란 다른 매체로 자기-자신이 확장된 것이나 마찬가진데,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다른 매체에 확장된 자신에게 현혹당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모든 권력은 나르시즘을 체계적으로 생산하는 경향성을 가진다. 권력의 자기성찰이 그 만큼 어렵고, 자기성찰이 작동하는 권력은 그 만큼 희귀한 이유다. 권력은 말하자면 겹겹으로 자기의 상이 맺히는 거울이 둘러쳐진 거울방이다. 자기 성찰적이라는 ‘글’도 일종의 거울매체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나르시즘의 도구로 퇴락하여 반성찰적으로 작동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갖은 종류의 인간이라는 거울매체에 둘러싸인 권력이 자기성찰성을 상실하고 스스로에게 매몰되는 일은 그야말로 ‘식은죽먹기’처럼 쉬운 경로다. 현명함의 대명사인 아우렐리우스의 현명함은 ‘나는 황제가 아니다’라는 말의 부단한 수행성에 있다는 지적은, 권력의 나르시즘 극복이 그 만큼 어려운 지난한 일이라는 지적과 같다.
빠져 허우적 거릴 때, 외부자의 시선을 제공하여 내부를 새롭게 조율하고 긴장을 불어 넣는 등의 새로운 균형을 유지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당위적으로 이게 모든 연구의 기능이고, 연구소라는 기구의 기능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기정당화에 머문 이번 포럼은 유감입니다.
2020. 08. 20
전 남 교 육 연 구 소 (책임작성자 :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