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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의 공동체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단단하게 굳어지게 되어있다.
살아온 세월이 주는 경험이 쌓여서 그걸 확증으로 삼으니 왠만한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념체계를 가진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자들은 사회체제의 주인이다 보니 그런 신념체계는 사회체제의 가치관을 그대로 복사한다.
말하자면, 나이든 남성들은 견고한 보수적 체제 자체가 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걸로 자기 삶이 완성되었다고 간주한다.
이러면 무얼하든 결국 꼰대가 된다.
결국 나이든 남성이 꼰대가 되는 건 너무도 자연스럽고, 한편으로는 손 쉬운 일이고, 피할길 없는 운명이다.
그걸 깨자면 색다른 충격이 필요한데 신형철은 그게 예술 또는 문학이라고 본다.
신형철은 "느낌의 공동체"를 통해서 그걸 말하고 싶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성공한것 같지는 않다.
"몰락의 에티카"에서 발굴한 황병승 같은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저기 그때 그때 휘갈겼던 산문들을 묶어 놓은 한계가 뚜렷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형철은 과문한 나에게는 당대의 가장 뛰어난 평론가다.
김현의 엘리트적 모던함을 넘고 넘어 예술 또는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다행이다.
같은 공기를 숨쉬는 신형철이 있어 이런저런 시대적 불안에도 불구하고 안도감이 든다.

하나의 일반론으로 마무리하자.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우리는 세 개의 명제를 얻었다. 1845년 봄에 마르크스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1873년에 19세의 랭보는 "사랑은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헛소리1)라고 쓰면서 '삶을 바꿔야 한다'는 명제를 제시했다. 20세기 초 프랑스와 러시아 등에서 창궐한 아방가르드는 마르크스와 랭보의 명제에 공감하면서 이에 덧붙여 '예술을 혁신해야 한다'는 명제를 제시했다.
그들 이후의 세계를 사는 우리가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세 명제를 쇠사슬로 묶어두어야 한다. 요컨데 제도와 인간과 예술의 동시다발적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 정치학과 윤리학과 미학은 한 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하나의 '규제적 이념(regulative idea)'으로서 늘 우리 앞에 존재해야 한다. 예술은 가능한 차선이 아니라 불가능한 최선을 지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시다발이 어렵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뒤에서 앞으로 진행돼야 한다. 예술이 제도의 혁명에 먼저 나서면 나머지 두 혁명이 유예된다. 한국에서 '진보'를 자임한 문학이 대개 그러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의 길이 아니다. 예술은 먼저 예술 자체를 혁신하면서 우선 인간을 바꾸고, 멀게는 제도의 변혁에 기여하겠다는 '가망없는 희망'에 헌신해야 한다. 그래야 셋 다 바뀐다.(느낌의 공동체 p.19)
(창작과 비평 2009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