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당신이 교사라면, 그리고 이런 교실에서 여기 있는 아이들을 가르친다면, 아이들의 국적은 5개 이상이고, 인종도 5개 이상이고, 아이들간의 계급적 편차가 얼마나 큰지는 자세히 알 수 도 없다.
2. 교사와 말다툼을 벌이다, 아이 한 놈이 있는데로 성질을 내면서, 가방을 휙 들어 올리다가, 뒷자리에 있는 여학생의 얼굴을 가방으로 할 뀌고, 꽝 문을 닫고 나간다. 여학생의 얼굴에는 피가 흐른다. 이런 종류의 일들이 최소한 하루에 한번은 발생한다.
3. 그럼에도 당신은 이 아이들과 날마다 무언가 의사소통을 해야한다. 그런 소통의 시도들은 번번히 벽에 부딪힌다. 통제할 수 없는 다양한 교실환경이 매 순간 판단보류를 요구한다. 그게 교사인 프랑수아가 항상 버벅거리는 이유다.
4. 겨우 소통의 숨통이 트이는 순간들이 잠깐씩은 있다. 아이들과 같이 공을 찰때, 소풍을 갈때, 또는 우연히 날마다 지지고 볶다보면 예측하지 못한 그런 순간이 있다. 그거에 의존하면서 하루하루를 겨우 버틴다.
5. 이 영화(The Class)를 교사들 30여명이 모여 함께 보았다.
영화를 보고난 다음의 반응들.
A : 프랑수아가 찌질이다.
B : 아이들을 휘어잡아야 하는데, 프랑수아가 너무 유약하다. 한마디로 카리스마가 부족하다.
C : 교실이 붕괴되었다.
D : 이런 환경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꾿꾿하게 아이들을 가르칠 자신이 없다
E : 푸랑수아를 이해한다. 저렇게 다양한 사회 문화적 변수가 있는 상황에서 매번 프랑수아가 판단보류를 하는건 올바른 태도다. 저런 교실에서 교사의 역할이란 모두가 다른 아이들 하나하나를 각기 다른 기준으로 접근하는 수 밖에 없다. 판단은 아이들이 하는거고, 일원론적 이성이 지배하던 근대성도 이미 무너지지 않았냐? 각기 다른 차이들이 넘치는 포스트모던한 세상에서 자기 판단을 앞세워서 교실을 휘어잡는 선생이 오히려 위험하고 또는 해롭다. 포스트근대사회에서는 푸랑수아의 리더쉽이 오히려 바람직한 교사상이다.
cf) 영화가 너무 사실적이어서 마치 내 교실에 누군가가 카메라를 들이밀고 찍은 다큐영화 같았다. 프랑스 영환데, 거기나 우리나 교사들이 힘들어하는건 똑 같았다. 단지 우리의 경우는 입시의 압력에 눌려서 아이들이 훨씬 유순하다. 그렇다고 입시라는 압박 수단으로 아이들을 옛날처럼 철저하게 묶어 둘수도 없다. 모든 교실에는 옛날과 다른 세상의 아이들이 있다. 인종적 차이가 프랑스 처럼 다양하지 않다 할지라도, 이미 우리 교실에도 다양한 차이들로 교실은 넘친다. 입시라는 학생통제 수단이 작동하지 않는 실업계 학교는 이 영화의 아이들 만큼이나 학생들이 거칠다. 그런 환경에서 체벌금지나 학생인권 같은 요구들은 변화된 환경에 대한 능동적 조처다. 학생들의 자기책임-자율성-자유-자아존중 같은 개개인의 개별성 영역에 대한 더욱 심도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과거와 같은 획일적 통제와 억압에 기댄 침묵을 요구하는 리더쉽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학생들을 삶이나 배움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타율적 지시와 억압의 대상으로서 바라본 우리 사회의 전통은 강고하다. 지금은 사회의 중추가 된 우리 자신들도 철저하게 그렇게 길러졌다. 그게 박정희와 같은 파시즘적 존재가 가장 휼륭했던 대통령이라는 여론조사 1위로 또는 박근혜 현상으로 아직도 우리 사회에 유령처럼 떠도는 이유다. 젊었던 시절 한국사회를 뒤집어 엎을 것 같았던 486세대들의 구태하고 강고한 가부장적 생활행태의 뿌리는 침묵하는 어린 시절의 교실이 아니라면 어디로부터 왔을까?
유럽사회가 민족주의에 뿌리를 둔 파시즘체제를 정리한 것은 68혁명이었다. 68혁명을 한마다로 정리하자면 ‘모든 귄위-권력에 대한 부정’이었다. 권위-권력이란 근대적 이성으로 뒷 받침되는 일종의 일원론적 진리체계인데, 이게 교실에서는 일원론적 진리체계를 담지하고 있는 교사의 권위로서 표현된다. 한국사회는 아직 이런 교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걸 극복하지 못하는 한 박정희체제의 귀환이라는 MB체제의 반복적 출현은 불가피하다. 그런점에서 프랑수아의 교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교사일반의 시각은 절망감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아이들을 배움과 자기 삶의 주체로 인정하고, 그 토대위에서 모든 교육실천 관행을 새롭게 짜야 한다. 그게 시대의 요구이다. 아이들을 가르침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몸에 익숙한 관행적 실천으로부터 탈피하여, 아이들을 배움의 자율적 주체로 인정하고 새로운 교육실천 관행을 확보하는게 필요하다. 그건 권위에 침묵하는 교실이 아니라, 차이와 의견들로 시끄러운 교실을 만드는 것에서 부터 시작할 수 밖에 없다. 혼란을 따뜻하게 껴 안아야 한다.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푸랑스아 처럼 시끄러운 교실을 견뎌내는 능력이라도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