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08. 04
자전거 타고 놀기
7. 천안-수원-용인
천안에서 수원까지는 1번 국도를 달렸다.
예상대로 도로가 차들로 넘쳐났다.
자전거 주행도로로 지금 까지중 최악이었다.
수원에 도착하니 피곤에 찌든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방학 중인데도 학교에 메여서 똑 같은 일상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다.
길거리 카페에 앉아서 시원한 냉커피를 마시면서 내 호사스러운 생활의 근거를 생각해 보았다.
내 삶을 돌보지 않고 나를 희생해 타인의 삶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가?
마음속을 떠나지 않는 질문 중 화두처럼 항상 따라다니는 질문이다.
여러가지 생각들로 마음이 심란했다.
커피를 마시고 좀더 달리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비가 추적 추적 내리고 있었다.
수원에서 용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오던길을 우회전해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크게 방향을 튼것이니, 한반도 남한을 직사각형으로 본다면 왼쪽 한면의 여행을 마친 상태였다.
해남에서 출발해서 서울까지 왔으니 언제라도 여행을 끝낼 심산이었다.
적당히 수도권 여기저기 기웃거릴 심산으로 그저 용인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수원과 용인 사이에 빗줄기가 장대비로 바뀌었다.
도저히 더 이상 진행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길거리 주유소 그늘 막에서 비를 잠깐 피하고 있는데, 추레한 60줄의 할아버지가 비를 쫄닥 맞은 모습으로 짐바리 자전거를 세우고 살갑게 말을 걸어왔다.
둘이 거의 한시간 가까이 시덥지 않은 말들로 서로를 위로해 주고 빗줄기가 멈추자 작별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근데 이 할아버지의 작별 인사가 시시껄렁했다고 생각했던 대화를 전복하고 말았다.
'언제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라는 마지막 한마디가 만남에 대한 내 부박한 생각을 후려쳤다.
나는 그저 스치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는 볼일 없는 그냥 지나치는 인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노인은 또 언젠가 만날지 모른다고 생각했나 보다.
갑자기 둘이 나누었던 이런저런 대화들을 되돌리면서 그 대화에 내가 너무 무심해서 혹시 상처주는 말은 없었는지 후회가 되었다.
나이가 주는 진중함의 무게 같은걸 한참이나 생각했다.
용인 민속촌 정문 근처 찜질방에서 취침.
8. 용인-원주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으니 동해안 까지는 가보자고 생각했다.
무지하게 달렸다.
용인 민속촌에서 출발해서 용인-이천-여주-원주까지 100km 이상을 달린것 같다.
용인 시내에 들어오면서 다시 굵은 빗줄기를 만났다.
빗물에 도로가 젖으면 훨씬 자전거 주행에 위험요소들이 증가한다.
우선 시야를 확보하는데 훨씬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하고, 자동차들이 주행하면서 튕겨내는 빗물들이 만만치 않은 장애물이 된다.
빗물에 젖은 도로변 주유소 바닥의 홈이 파인 스테인레스 설치물들은 치명적이다.
차량의 빗물을 피하기 위해서 도로변에 주유소가 있으면 그쪽 안으로 들어가 잠깐만이라도 편안한 주행을 시도하는데, 이때 스테인레스 재질의 홈이 파인 바닥설치물과 자전거 바퀴가 접촉하면 100% 바퀴가 미끄러지게 되면서 자전거의 통제력을 상실한다.
몇차레 그런 경험을 했었지만 무사히 그럭저럭 자전거의 통제력을 회복하곤 했는데, 오늘은 완전히 스키를 타듯이 미끄러지면서 자전거와 몸뚱이가 내동댕이 쳐졌다.
일어나 보니 무릅을 시멘트바닥에 세게 가격한 무거운 통증이 느켜졌다.
여행 끝까지 이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원주에 도착하니 너무 피곤했다.
침대가 있는 편안한 잠자리가 그리웠다.
원주역 근처의 모텔을 잡고 오랜만에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빨래도했다.
어둑할 시간에 원주를 구경할 겸 샌달을 끌고 중심가를 배회했다.
고색창연한 원주라는 느킴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도시는 모두 구도심과 신도심의 이원적 도시형태를 가지고 있다.
구도심은 자가용 자동차가 보급되기 이전의 도심이고, 신도심은 자가용이 도시를 팽창시키면서 새롭게 조성된 도심이다.
대한민국 모든 도시는 이런 정형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적한 식당에서 밥먹으며 주인에게 물어보니 원주는 신도심이라는게 없단다.
원주는 구도심이 신도심에 활력을 빼앗기지 않은 북적거림이 있는, 70년대나 80년대의 어느 도시에 내가 와 있다는 묘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느낌을 떨 칠 수 없었다.
처음 와보는 도시인데도 역전-시장-도심이 한데 어울어진 친숙한 느킴이 가는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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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 I try to tempt y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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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bsence of you drives me s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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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원주-봉평
처음으로 자전거 여행을 시도한걸 후회했다.
산속 어딘가에 조난을 당해서 파묻혀 있다는 느킴이 들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거대한 산이 내 앞에 버티고 있었다.
아침부터 크고 작은 고개들을 몇번 넘으면서, 그저 그런 지금까지 왔던 길들과 비숫한 길들을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또 하나의 산모퉁이가 나타났을때 그런 심정으로 산길에 접어들었다.
한참이나 낑낑대면서 산모퉁이를 하나돌고 이제 내리막길이 나타나리라고 생각했다.
근데 다시 가파른 경사가 내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산모퉁이가 하나 더 있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또 자전거를 끌고 비탈의 끝에 헉헉 거리며 다가섰다.
그 비탈은 다시 다른 비탈의 시작이었다.
처음 몇번 그런 비탈길의 끝이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기대를 속이는 산모퉁이를 몇개 돌고 나니, 내가 생각했던 길이 아닌 모양이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연 팽팽한 긴장감이 내 근육에 전달되어 왔다.
점심도 먹지 않은 상태였고, 물도 준비하지 않은 상태였다.
알수 없는 도전의욕이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느켜졌다.
그런 도전의욕으로 몆개의 산모롱이를 돌아 올랐다.
목이 말랐다.
할 수 없이 도로변 절벽에서 떨어지는 물을 그대로 입을 대고 받아 마셨다.
시원한 물줄기가 내 입에서 바로 혈관을 타고 몸속 여기저기로 퍼져나갔다.
그것이 곧바로 피부에 이슬처럼 맺혔다.
산모퉁이를 돌때마다 절벽을 타고 내리는 물이 있으면 받아 마셨다.
이제는 도전의욕 같은 것도 없어졌다.
산모퉁이를 돌아 비탈길이 나타나면 그래 또 올라가면 되지 뭐! 하는 묘한 초월감 같은 것이 들었다.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차량도 거의 끝긴것 같았다.
이러다가 산속에 고립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산의 능선들이 보이는 지점에 다다랐다.
공기가 서늘해지고, 안개가 자욱하게 낀 모습이었지만 산의 전체 모습이 부분적으로라도 확인이 되니 정상에 도달하지는 않았지만 산속에 고립되지는 않을것 같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산의 능선들이 보이니 다시 빨리 산을 넘어야겠다는 조바심이 들면서 조금전의 초월감을 잃고 산의 비탈들에 투덜대는 내 자신이 나타났다.
그렇게 한참이나 낑낑 대면서 싸우고 나서야 겨우 정상에 도달할 수 있었다.
태기산 1000m 라는 팻말이 나타났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겨우 이런 정도에 그렇게 안달복달하다니 갑자기 우스워졌다.
버스로 히말리아 트래킹을 할때 해발 5000m 지점을 자전거로 넘고 있는 사람들을 본적이 있다.
기골이 장대한 유럽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의 체력과 도전정신이 부러웠었다.
1000m 고지 태기산은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거다.
다시 몸을 추스리고 고개마루에서 자전거를 타고 산을 내려왔다.
바로 산아래 용평 스키타운을 지나니 봉평이 나타났다.
날은 완전히 저물어 봉평읍의 내온 사인이 휘황하게 보였다.
메밀꽃 필 무렵의 장돌뱅이와 동회는 이런 야심한 시각에 등짐을 지고, 걸어서 그 산을 넘었을까 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짠한 마음이 가슴속에 이는것이 느켜졌다.
누추한 여관을 잡고 식당에 갔다.
술에 밥말아서 배가 터지게 먹었다.
10. 봉평-강릉
원주-봉평간의 구간에서 워낙 고생을 해서 아침에 일어나 출발하기전에 봉평-강릉 구간에서는 얼마나 많은 고개를 넘어야하는지 확인했다.
큰고개 3개를 넘어야 한단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잠깐 일었지만 마음을 다 잡고 일단 출발했다.
첫번째 속사고개 중턱에서 앞타이어 펑크가 났다.
처음 경험하는 펑크라서 약간 당황되었지만 펑크에 대비한 기구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걱정 되지는 않았다.
우선 공기를 빼고 타이어를 림에서 분리하고 다시 타이어에서 튜브를 분리했다.
그런 다음 튜브에 공기를 주입하고 어는 부분에 펑크가 났는지를 확인하면 된다.
이 과정에 물이 반이상 담긴 대야 같은 기구가 필요하다.
이게 없으면 세심하게 튜브를 맨눈으로 살펴서 공기가 빠져 나가는 곳을 찾아내야 한다.
근데 나이 탓인지 눈으로 공기가 세는 부분을 확인할 수 없었다.
땡볏 아래서 이짓을 하고 있자니 날씨는 덥고 짜증이 났다.
자전거를 내동댕이 치고 싶었다.
그 순간에 여분의 튜브 생각이 났다.
앞바퀴를 완전히 분리해서 펑크난 튜브를 분리하고 새 튜브로 갈아 끼웠다.
그리고 역순으로 튜브를 타이어안에 밀어넣고, 타이어를 림에 밀착시키고 마지막으로 다시 튜브에 공기를 주입하면 끝이다.
성공적으로 펑크를 수리하였다.
2시간 이상 펑크에 매달려 있었다.
이 과정에서 얻은 펑크수리 교훈 하나를 잊지 않기 위해서 남겨둔다.
타이어를 림에서 분리할 때 절대로 예리한 모서리가 있는 드라이버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각이 예리한 물건은 타이어 안에 있는 튜브를 100% 손상시켜서 튜브를 아예 못쓰게 만드는 경우를 발생시킬 수 있다.
끝이 둥글 둥글한 공구의 손잡이 같은 부분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다른 하나는 펑크 수리후 타이어를 림에 부착할때 망치 같은 물건으로 두드려서 타이어가 림에 잘 밀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거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다시 튜브에 공기를 주입했을 때 튜브가 타이어와 림 사이의 빈 공간을 뚫고 나오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아뭏든 펑크 문제를 해결하는데 2시간이 넘는 시간을 투자해야했다.
이후로 서너번 더 펑크에 대처하면서 20분 정도에 펑크를 수리할 수 있었다.
펑크를 수리하고 속사고개를 넘으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주변 기사식당 같은 곳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서둘러 다시 출발했다.
오늘 강릉에 도착하기가 무망한 일처럼 느켜졌다.
장마가 끝나고 찌는 듯한 무더위로 고통스러웠다.
두번째 고개인 진부고개를 넘었다.
그리 높지도 가파르다고 느켜지지도 않았다.
마지막 대관령 고개 하나만 남았다.
말로만 듣던 대관령 고개 굽이 굽이를 상상하면서 못 넘으면 중간에 노숙이라도 하겠다는 작심을 하면서 달렸다.
중간에 갈증으로 목이 타는듯 했다.
준비했던 물도 진즉에 다 떨어져 버렸다.
주변에 가게도 없어서 할 수 없이 대관령 기상대라는 데에 들러서 도움을 요청했다.
직원중 한분이 황송할 정도로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정말 고마웠다.
대관령 주변의 경치는 우리나라 일상적인 풍경과는 확실히 달랐다.
무척 이국적이고, 시선도 시원하게 트여서 정말 아름다웠다.
경치를 즐기면서 밋밋한 경사로를 조금더 올라가니 거기가 대관령 정상이란다.
허무했다.
가만히 뒤돌아 보니 태기산 고개를 넘은 이래로, 고원분지 지형 위 몇개 고개들을 앞에 두고 나는 겁을 먹었던 것이다.
대관령 고개에서 강릉 쪽으로 내려오면서 그 사실을 확인했다.
한시간 이상의 내리막길이 대관령 정상에서 강릉까지 계속됐다.
대관령 고개가 높다는 것은 동쪽에서 대관령을 넘을 때이고, 서쪽에서 진행할 때는 태기산 고개가 높다고 해야한다.
다시 말해서 태기산 정상에서 대관령 정상 까지는 거의 고원 분지 지형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신나게 내려 오면서 낑낑 거리며 자전거를 끌고 대관령을 오르는 반대편으로 진행하는 많은 바이커들을 만났다.
내가 태기산을 오르던 모습이 보였다.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조금만 더 가면 정상이라고 격려했다.
해가지기 전에 강릉에 도착했다.
장마 뒤의 본격적인 여름 더위로 강릉시내가 찜통처럼 더웠다.
더이상 북적거리는 사람들 속에 있고 싶지 않았다.
서둘러 강릉을 떠나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시간 쯤 달리니 안인진 해수욕장이라는 시원하게 탁트인 동해안 바다가 눈 앞에 펼져졌다.
지금까지 강원도 산속에서 답답하게 묵여있던 내 존재가 한꺼번에 천지사방으로 풀려 나가는 듯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동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좋은 곳의 모텔에 여장을 풀었다.
시원하게 샤워도하고 땀에 젖은 온갖 것들도 다 빨았다.
편안한 아늑함이 밀려왔다.
선모텔 40,000원(이만원깍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