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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먹기 또는 놀기

키치적 장난감(재미로 만든)


신은 죽고, 자연은 인간을 향한 문을 닫았다.

벤야민에 따르면 최초의 소리는 자연의 모습을 형상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소리는, 음성 그 자체에 사랑의 의미를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당연히, 단풍나무라는 소리는 단풍나무의 의미를 마땅하게 보존하고 있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이 세상을 처음 지을때 그것은 말씀이었다.
그때의 말은, 언어는 세상의 본질 그 자체였다.
자연과 그 소리가 순수하게 일치했다.
그것은 아담이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순수한 소리였다.

신이 되고 싶었던 인간은 바벨탑을 세웠다.
바벨탑을 세우며 인간은 최초의 언어인 신의 소리를 잃었다.
대신에 그는 서로 다른 인간들의 언어를 가지게 되었다.
인간의 언어는 수 없이 많고, 달라서 서로의 의사소통을 가로 막았다.
언어는 자연의 모습과 더이상 닮지 않았다.
사물의 의미를 엃어버림으로서 인간의 언어는 의미없는 기표에 불과하게 되었다.
의미는 소통하지 못하고, 공중을 부유하면서 떠 다니게 되었다.
바벨의 언어는 자연의 의미를 잃어버린 상실의 증상이었다.
기표는 기의에 가 닿지 못하고 영원히 미끌어지는 시지프스의 바위가 되었다.

그로서, 자연은 인간을 향해 열려있던 문을 걸어 잠갔다.
인간의 언어는 자연과 더 이상 소통할 수 없었다.
소통하지 못하는 인간은 자연을 착취와 소유의 대상으로 보았다.
자연을 정복하면서 인간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역사의 이런 세속적인 전개는 세계의 고통의 역사였다.

신의 언어를 잃은 인간은 영원히 소통의 불구가 되는 길을 피할 수 없었다.
소통을 차단당한 인간은 외로움에 떨어야 했다.
인간은 다시 잃어버린 신을 호출했다.
하나님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이떻게든 막힌 소통의 통로를 열어 보고자 했다.
자연으로 부터 소외된 고통을 치유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성의 망치를 든 현대는 그 신을 내리쳐 살해했다.
신마저 죽고, 이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남지 않게 되었다.
자연과 신이 사라지자 인간자체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포스트모던(후기현대)은 의미를 창출하지 않고, 그저 키치적으로 장난을 친다.
어디에서도 의미생산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자연은 차단되고, 신은 죽고, 인간이 사라진 이후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존재는 참을 수 없이 가벼워졌고, 키치적 삶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제 키치가 진실이 되었다.

(진중권의 '현대 미학 강의' 발터벤야민 편에 기대어 씀)
(밀란쿤테라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기대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