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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대기

저널리즘 자본과 우즈



우즈의 스캔들이 점입가경이다.
그걸 생중계하는 황색저널리즘의 신명이 부산스럽다.
비 오는날 먼지 날 만큼 열심이다.

저널리즘 자본이 만든 우즈가, 바로 그것에 의해서 폐기 처분 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자본이 그악스럽다는건, 폐기하면서도 충실하게 자기 이익을 챙기고 있다는 점이다.
폐기하면서 떨이 믈건 처분하듯이 마지막 남은 이익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다.

스캔들이란 보편적 부패와 타락을 은폐하기 위한 장식품이다.

그걸 알기에는, 그는 너무 나약하거나 아니면 자본의 달콤함에 너무 중독 되어있다.
저널리즘에 맞서야할 때, 항복문서를 들고 긴다.
스캔들의 먹이감으로 자신을 손색없이 꾸며준다.

모름지기 저널리즘을 가장 화려하게 꾸며주는 스타의 이면은, 가장 좋은 희생양이다.
그렇게 저널리즘은 그를 두번 팔아 먹는다.
한번은 살을 발라서 싱싱한 횟감으로, 두번째는 뼈를 삶아 매운탕으로.  
이로서 우즈는 21세기의 먼로가 된다.
자본이라는 제단에 바쳐진 제물로 소비된다.

보드리야식으로 말해서, 워터게이트가 정치의 일반적 부패와 타락을 은폐하기 위한 스캔들이라면,
우즈는 가족제도의 일반적 해체와 몰락을 은폐하기 위한 스캔들이다.
그렇게 해석하자면, 우즈 스캔들은 미국 사회 가족제도의 전통적 규범 능력이 소진되었음을 반증하는 지표다.
사회적 여유가 있다면 아마도 미국의 가족제도는 유럽의 방향을 따라갈 것이다.
아니면 강팍하게 전통을 복원하려 시도할 것이다.

우즈가 먼로가 됨으로서, 개인적으로는 자본의 제물로 전락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의 작동시스템과 본질도 더욱 선명하게 노출시켰다.
세상에 언제나 일면적인 것은 없듯이 우즈의 몰락은 저널리즘으로 표상되는 자본의 작동방식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론 상처겠지만, 그의 고통은 미국사회가 치루어야할 사회적 비용의 파편이다.
 
언젠가 그가 하이에나 같은 황색저널리즘을 털고 자신을 위해서 좋아하는 골프를 즐기기 바란다.


"스캔들의 고발은 항상 법에 바쳐진 하나의 존경이었다.
그들은 부패와 부도덕이 권력과 자본의 항구적 본질이라는 사실이 폭로되는 것을 막고 그것을 한갓 우연적 일탈로, 스캔들로 바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장 보드리야르(진중권. 현대미학강의. p. 267. 재인용)---



( Fransis Bacon - Portrait : 프란시스 베이컨의 자화상 )
들뢰즈가 근대적 이성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지각에 대비하여, 보다 심층적인 감각의 세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인용하는 대표적인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