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댓글 낙서 : '신은 죽었다(대학생)' '너는 죽었다(신)' '너희들 둘 다 죽었다(화장실 청소 아줌마)
언젠가 화장실에서 발견한 낙서다.
지금까지 발견한 가장 품격있는 화장실 낙서다.
이 낙서는 유머 그자체로서도 재미있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가 우리의 일상에서 흔하디 흔한 말이라는 걸 보여준다.
니체의 이 말을 비교적 상세하게 이해하는데는 몇 가지 난관들을 거쳐야 한다.
첫번째 통과해야 할 지점은 신의 죽음이 가져오는 절대적 가치기준의 상실이다.
신은 만물의 척도이고, 만물이 존재하는 토대이다.
그런데 신이 죽었다는 것은 만물을 존재하게 해주는 어떤 초월적 실체의 사라짐이자, 선악이나 미추를 판단케 해주는 절대적 가치 기준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의 행위 준거가 될 수 있는 절대적 가치기준이란 없고, 세상의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한다면, 선/악, 미/추, 정의/부정의, 도덕/부도덕 등의 판단이 불가능해진다.
신이 죽었다는 말은 조금만 밀고 나가면 지금까지 인간존재의 근거를 가능케했던 모든 기반이 무너진다.
신이 죽었다는 말은, 인간이 죽었다는 말이 된다.
이 지점에서 니체는 위버맨쉬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다.
신이 죽었고, 그에 따라 인간도 죽었다.
그렇다면 이제 새로운 종이 이 세상에 태어나야 한다. 그게 위버맨쉬(over man)이다.
신의 죽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종으로서 인간을 그는 위버맨쉬, 우리말로 번역해서 초인이라고 명명했다.
지금 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간의 탄생.
인간은 이제 외부의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자립적인 존재근거를 창출하고 만들어 내야 한다.
이런 논리는 나태한 인간을 움츠리게 한다.
나약한 인간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어떤 기준에 의존하고 싶어한다.
스스로 미추, 선악, 윤리체계 등을 만들려하기 보다는, 익숙한 어떤 준거들에 미혹 당한다.
결과로 신을 부정한 다음, 인간의 나약함은 새로운 신을 만들어 낸다.
죽은 신의 자리에 또 다른 신들이 계속 재탄생한다.
그게 세속의 모습이다.
그래서 니체는 엄숙하고 심각하게가 아니라 희극적으로 신을 죽였다.
즐겁게 신을 죽여야 인간이 새로운 상황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한다.
신의 죽음이 장엄하지도 않고, 심각하지도 않고, 엄숙하지도 않다면, 더 나아가 그게 우스운 일이라면, 인간은 신의 죽음을 애도할 일도, 걱정할 일도 아닌 재미있는 놀이로 받아 들일 수 있다.
그래야만 기쁘게 인간은 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상황을 즐길 수 있다.
흔히 역사는 두번 반복된다고 말한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하지만 어떤 역사가 희극으로 반복되고 나면 그것은 다시 돌아오기 힘들어진다.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그것에 아무런 집착이 없다는걸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의 죽음이 희극적이라는 주장은, 인간이 결코 새로운 우상을 필요로하지 않고 즐겁게 신의 죽음을 맞이한다는걸 의미한다.
어떻게 신의 죽음이 희극인지는 다음 말에 있다
'유일신은 자기가 창조한 인간의 추악함에 연민을 이기지 못하여 죽었다.
나머지 다른 신들은 <신은 유일하다. 너는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유일신의 말에 웃다가 죽었다'
이런 니체의 말이 웃기는지 어쩐지는 독해의 정도에 따라 다를거다.
그래서 다시 요약하자면, 니체는 더 이상 초월적인 실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가, 자기삶의 주인이 되어 환하게 웃을 때, 신의 죽음이 찾아 오며, 그때의 신의 죽음은 인간에겐 가장 축복스런 일이 될거라는 주장이다.
cf> 개인적으로 신이 있는지 없는지 아예 관심조차 없다.
근데 공공장소에서 스피커 만땅으로 틀어놓고, 괴상한 팻말들고 윽박지르는 광신도들은 불편하다.
사람 많은 지하철을 이용하면 그런 장면들을 피할 수 없다.
사람 많은 서울 다 좋은데, 이런 사람들 그냥 웃고 지나치기에는 너무 무례하다.
좀 조용히, 그리고 억지로 사람 붙잡지는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이 글은 그런 언짢은 감정을 해소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너무 사소한 웃기는 복수일까?
어짜피 블로그란게, 익명의 개인으로 불쾌한 자기 감정을 소비하는데 유용한거 아닌가 !
다시 꼰대 기질 살아난다.
그래서 고만! 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