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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경치

촛불시위에 대한 단상 1

촛불시위에 대한 단상

1. 촛불시위를 해석할려는 열망

촛불시위를 이성적 논리로 설명하려는 욕망이 있다.
이떤 하나의 해석틀을 들이대서 그것에 잘 꿰어 맞추는 것이다.
최대한 촛불시위를 폭넓게 해석할수록 좋겠다.
그러나 이런 욕망 자체가 대중을 어떤 하나의 흐름으로 수렴하고 싶은 권력의 욕망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버릴려고 노력한다.
진중권처럼 촛불시위를 그냥 따라다니면서 같이 노는 태도가 촛불시위를 가장 존중하는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최장집은 흘러넘치는 다중의 분출을 제도적으로 담아낼 정당정치 제도를 열망한다.
그의 주장을 따르자면 다중들이 새롭게 헌법을 만들자고 주장하도록 인도해야한다.
80년대 제헌의회소집 같은 구호로 다중의 흐름을 하나의 홈파인 공간으로 수렴해야 한다.

그러나 강력한 지도부가 나서서 그런 주장을 하는 순간 다중들은 뿔뿔히 흩어질 것 같다.
다중을 작위적으로 조작하는 순간 다중은 동질적인 대중이 될것이다.
그런 동질성에 포섭되지 않는 다중은 운동의 동력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진중권이나 우석훈 처럼 다중이 자유롭게 흘러넘치도록 하는것, 그걸 어떤 하나의 해석틀로 수렴하지 않을려는 자세가 올바르다.

2. 국가주의
 
촛불시위에 참가하는 많은 사람들이 애국주의적 열망에 휩싸인 모습을 보인다.
이명박도 강력한 국가주의를 상징하는 정치권력이다.
이들은 명박식의 국가주의가 맘에 안든다는 거다.
국가에 대한 상징개념이나 욕망이 서로 다르다.
그 차이가 무언지에 대한 생각을 버릴수가 없다.

3. 분열증적인 다중

지금 현재 다중들을 사로잡고 있는 정서적 감수성은 분명히 분열증적이다.
좀 과장되게 설명하자면 촛불시위자들이 극장에 가서는 친미적이고 파시즘적 냄새가 풍기는 수퍼히어로 영화 아이언맨이나 인디애나존스를 본다.
길거리에 나와서는 촛불을 든다.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영화관 관람객과 촛불시위자들이 차이나는 존재들이 아니다.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다.

하나하나의 개인이 수없이 많은 존재로 분열하는 그야말로 개인이 다중인 현실이다.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개인의 존재 방식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서구의 어느 선진국도 경험해 보지 않았던 새로운 종의 탄생 비슷한 성격이 있다.
포스트모던한 인류의 출현을 보는것 같다.
그런 다중성은 인터넷, 핸드폰 같은 첨단정보기술 제품에 의해서 촉발되는 것 같다.
수없이 많은 존재로 분열하면서 존재하는 이런 다중적 개인 또는 다중에 맞는 사회체제를 상상해야할 것 같다.
아니면 차라리 그런 체제적 상상자체를 버리든지!

4. 흐름

명박정권을 탄생시켰던 흐름이 단 한순간에 뒤집어졌다.
다중의 욕망이 어느 하나의 일정한 홈파인 공간을 따라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흐름은 여기저기로 흘러 넘친다.
강력하고 매혹적인 파시즘적 국가주의에 대한 요구도 있고,
반미적인 정서도 있고,
노무현 김대중 시절에 만들어진 절차적 민주화를 지켜야한다는 열망도 있고,
생활정치를 보살펴 달라는 욕망도 있다.

지금은 위에 열거한 흐름들이 몇가지 큰 흐름인거 같다.
그러나 진짜로 이런 방향으로만 다중들의 욕망이 흘러넘칠까?

명박 정권으로는 이런 흐름들 중 한두개도 포섭할 능력이 없어 보인다.

카오스적인 분열을 긍정하면서 창의적으로 볼수있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구좌파의 계급주의적 관점으로도 안되고,
민족담론으로도 안된다.

어디로 다중들이 흘러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10대들을 대입해 보면 더욱 알 수 없다.

아뭏든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다.
그게 어떤 세상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