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밤 서울에 도착해서 3일째다.
광화문에서 무적의 김밥부대로 부터 김밥도 물도 얻어 먹었다.
'김밥조공'이라는 깃발을 든 트럭이 12시가 넘어가자 김밥을 준다.
자유발언대에서는 여학생이 시민들 배꼽을 뺀다.
자기는 오기 싫은데 엄마가 자꾸 가라고 한단다.
자기 엄마 때문에 귀찮아 죽겠다고 한다.
누가 자기 엄마좀 말려 달란다.
여기저기 문화공연이 열린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예전엔 10대들을 신뢰하지 못했다.
입시에 찌들어서 비판적 성찰이나 사회인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단지 내 편견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대상을 하나의 고정된 실체로 파악하는 오래된 습관에서 유래된 생각이었을거다.
고정된 무엇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한번 새긴다.
접속상태가 변하면 모든 존재는 다르게 변화한다.
너무 단순하고 분명한 명제를 생활속에서 실천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은 확실히 변했다.
내가 지금까지 알던 세상이 아니다.
서울에 와서 다시 한번 느낀다.
다중이 어디로 흘러갈지 그건 누구도 알지 못한다.
현실이라는 단단한 제방을 따라 흐르던 대중이 그 제방을 넘어 사방으로 흘러넘친다.
그 다중이 어디로 흘러갈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김우창이 촛불집회가 해결책이 아니라고 말할 때, 그것은 기존의 진보지식인의 시각으로는 촛불집회가 전혀 해석되지 않는다는 고백과 다름 없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실제 현장에서 보니 더욱 그렇다.
시민대책위는 그저 판을 벌려놓는 역할이 전부다.
기껏 할 수 있는건 자유발언대를 운영하는것이 전부다.
그것도 어린 학생들한테 구박을 받으면서 겨우겨우 진행한다.
현장에서 보면,
한나라당은 out 당했다.
민주당은 비웃음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민주노동당은 강기갑을 빼면 시체나 다름없다.
진보신당도 진중권이 그럭저럭 상황을 쫒아간다.
심상정이나 노회찬은 뻘쭘해 보인다.
다중의 터져나오는 욕망을 미심쩍어하면서 따라다니는 모습이 역력하다.
현실정치에 몸담다보니 그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버리는 흐름들에 기가 질린것처럼 보인다.
시민단체도, 여성단체도, 노동조합들도 10대들이 보여주는 발랄함을 따라가지 못하는게 역력하다.
조희주가 힘겹게 혼자들고 있는 전교조 깃발이 생뚱맞아 보인다.
어린 학생들이 들고 있는 조악한 손 팻말이 훨씬 휘황찬란하다.
프랑스 6.8혁명이 어린 학생들 몇명의 장난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게 이런게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조금 지나면 기존의 귄위를 철저하게 부정하자고 할거다.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을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유도했던 제방을 무너뜨리자는 욕망이 분출할거다.
그 지점을 통과하면, 촛불시위는 문화제에서 혁명으로 물길을 튼거다.
그때 흐름을 일정한 방향으로 모을 수 있어야한다.
지금의 다중이 가지는 다양성 창의성 자율성을 담아낼 뭔가가 필요할거다.
그걸 상상할 수 없다면 현재의 광화문이 단지 욕망의 분출로 끝날수도 있다.
한국사회가 새로운 단계에 진입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궁금하다.
진보적 시민사회도, 여성운동도, 노동운동도 지금 당장 혁신해야 한다.
이런 흐름을 담아낼 새로운 상상을 못한다면 희망이 절망으로 바뀔수도 있다.
현장에 있는 수도 없는 조직들이 아마 깊은 고민에 빠져 있을것 같다.
거기서 어떤 모색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지금의 욕망은 또다른 흐름에 쓸려갈거다.
자본은 탈주선들을 뒤 쫒아서 재빨리 자기영역으로 포획한다.라는 명제를 뛰어넘어야 한다.
자본이라는 이름에 권력을 대입하면 어떤 그림인지 그려진다.
한나라당이나 이명박 정권이 분출하는 다중의 욕망을 포섭할 대안적 상상력을 기획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자연스럽게 상황이 무조건 좋아질거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파시즘적인 엉뚱한 흐름으로 갈수도 있다.
나치정권은 독일 좌파정당들이 가장 역동적인 국면에서 탄생했다.
그것도 선거라는 과정을 통해서 국민들이 만들어 냈다.
광장에서 새로운 대안적 권력을 상상해야 한다.
그건 자유분망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그 무엇이어야 한다.
김우창이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그건 기존의 진보 담론으로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의 반증이다.
무언가 그림을 그려야하고,
그 그림은 광장의 자유로움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한국사회가 역사의 한경계를 넘어서는 지점에 있다.
여기를 구분선으로 세상을 보는 프레임은 어떤식으로든 변할거다.
일상의 경치